
나는 조르바가 될 수 있을까?
조르바가 되고 싶어,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10여 년 전 쯤 여행을 가면서 들고 갔던 책이다.
이후 한번 더 읽으며 밑줄을 그었고, 지금 또다시 꺼냈다.
내 자신이 왠지 매여있다고 느낄때면 자유로운 짐승같은 조르바가 그리웠고, 어쩌면 '인간을 속박하지 않는 (너그러운) 신(神)' 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60년도 넘게 살았는데도 아직 가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가 고민된다.
나름 인생에 대한 철학은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지만, 문제는 ‘자유’를 두고 내 영혼과 육체가 아직도 갈등하고, 잘 조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나이가 얼만데,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
나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다. 거기다 타고난 방랑기와 역마살, 보헤미안 기질, 조르바의 기질도 있다.
그러다보니 내 욕망은 안으로부터 꿈틀거리고, 훨훨 날고도 싶은데 .... 몸도 마음도 묶여있다.
종교와 도덕에 얽매이고, 가족에 대한 책임에 얽매이고, 직장생활은 장소와 시간과 질서로 나를 또 구속한다.
누가 차꼬를 채운 것도 아닌데 내 스스로 차꼬를 차고, 울타리에 갇혀 자유를 그리워하는 짐승처럼 속으로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이때면 내 또래 조르바가 부러워진다.
“왜요? 왜? 왜? 그 왜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합니까?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요”
인간 역시 짐승이다. 조르바는 짐승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하고 싶으면 하는 사람,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떨어지지 않은 야성을 가진 사람, 논리와 도덕과 정직과 문명 이라는 껍질을 부수고 나오려는 원시인, 요즘 말하는 자연인이다.
그럼에도 많이 배운 사람보다 더 이성적이고 더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에 단숨에 가 닿는 사람, 도자기를 빚는 일에 빠졌을 때는 돌림판을 돌리는데 거치적거린다고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버렸던 사람, 여자는 나이를 떠나 모두가 아프로디테라며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바람둥이. 건달, 하지만 터키 놈들에게서 뺏은 금화를 공중에 뿌려 버릴 수 있는 그런 게 바로 자유라고 말하고, 육체적 사랑으로만 대했던 착한? 늙은 과부 오스탕스 부인이 병들자 죽음을 맞을 때까지 따스하게 곁을 켜주었던 인간미 넘치는 사나이였다.
아니, 모든 사물과 늘 새로움으로 만나고, 끊임없이 놀라는 어린아이였으며, 인생의 철학자였다.
그가 뱉어내는 푸짐한 말들 속엔, 단순하지만 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다. 그것은 삶의 본질이었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 정열에 이르기 까지,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그의 말은 어렵지 않고 단순해서, 가슴을 바로 찔러온다.

그렇다. 우리가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 고상한 정열에 빠지는 것, 사상이나 종교에 빠지는 것은 우리를 노예상태로 만드는 것들이다. 특히, 우리가 따르는 그것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묶이는 노예의 사슬은 더 길어진다.
지금 나도 이런 여러 겹의 사슬에 칭칭 감겨있다.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뭔가 자꾸 집어 넣으려는 것,으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거나 마음에도 없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 이런저런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초조함도 은근히 나를 옥죄는 사슬이고, 직장 역시 단단한 족쇄다.
나는 언제쯤이면 성스러운 확신으로 내면이 고요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죄악과, 늙음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고, 거침없이 행복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육체와 영혼이 내 안에서 화해하고, 인위적이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잘 쓴 산문 같이, 내 삶의 행간 하나 하나에 정갈함과, 의미와, 감성과, 사랑이 넘쳐날까?
부딪혀 깨어지고 다시 돌아가는 파도를 바라보다 나도 파도의 한 자락이 되듯, 조르바를 읽으면 나도 당장 조르바가 되고 싶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대로 내 몸을 맡기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고 싶다.
육체는 영혼을 담고 가는 그릇이다.
“육체에도 영혼이 있답니다. 몸을 가엽게 여기세요. 뭘 먹이셔야지요.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영혼을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거라고요”
맞다. 내 육체가 즐거워야 내 영혼도 평안하다.
영혼을 지고 가는 육체라는 짐승에게, 잘 먹이고 포도주도 한잔 주지 않는 것은, 동반자에 대한 배신이고 착취다. 육체가 사라진 다음에도 우리에게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 과연 남는 걸까?
한번 뿐인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영원히 살 듯 오늘을 열심히 살고, 어떤 사람은 오늘이 마지막인 듯 후회 없도록 산다.
죽음이라는 봉우리에 닿는 두 갈래 길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자신의 몫이다.
인생의 기쁨에는 항상 죽음의 냄새도 함께 한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초라한 나 자신의 둘레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스스로 믿는 장벽을 쌓고, 그 틀안에서 행복을 찾고, 자기만의 삶의 질서와 안녕을 만들려 한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는 것은 나를 맨 목줄이 좀 더 길다는 것 뿐인데 사람들은 그걸 자유라고 느낀다. 사실은 줄 끝에 매여 있는 것이고, 그 울타리 안에서 벌레처럼 꼼자락 거리며 사는 것이다.
이성은, 종교는, 도덕은 ... 욕망이 뚜껑을 열고 나오지 못하게 누르고, 파닥거리며 날려고 하는 날개를 자르고 또 자른다.
자유하려면 그 매인 줄을 도끼로 잘라버려야 한다.
“우선 배를 채우고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어정쩡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우리 돈방석에 앉으면 돛 세 개가 달린 배를 사서, 뒤도 안돌아 보고 세계 일주를 떠납시다. 내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고, 이빨도 흔들거려요, 나는 미적거릴 틈이 없단 말입니다.”
지금 내 머리가 허옇게 세었고, 무릎 관절이 아파오려 한다.
죽기 전에 세계여행을 하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왜 조르바는 그게 되고, 나는 안 될까?
조르바는 펄떡 펄떡 뛰는 심장과 미칠 듯한 사랑, 기막힌 정열을 가졌고, 나는 매사에 이유를 따지고 핑계를 댔다.
그런 내가, 과연 조르바가 될 수 있을까?
종교와 도덕에 구속받지 않고, 가족에 대해 책임을 줄이고, 경제력이 갖춰지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
그러면 나는 조르바처럼 울타리 없고, 목줄 없는 짐승이 되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나는 글에서는 늘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조르바는 삶속에서 행동으로 자유를 실천했다.
영혼과 육체의 갈등문제,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조르바는 알렉산더 대왕이 어려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듯이 쉽게 풀어낸다.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단순해지고, 본능에 더 충실하여 사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육체와 영혼이 다 편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수도사도 육체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고, 조르바 역시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느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도, 하늘도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데 하물며 인간이랴, 그래서 일부는 이루고, 일부는 아쉬움을 남기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행복은 언제나 자신과 같은 높이에 있다.
행복은 멀리, 크고 좋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앞마당에, 삼겹살에 소주 한잔, 가벼운 옷차림, 부드러움 바람, 달콤한 잠처럼 작고, 단순한 것에 있다.
뭘 더 가지려고, 더 이루려고 구속되어 사는 삶 에는 아무런 색깔도, 맛도, 의미도 없다.
인생은 새어나가는 모래 같다.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더 움켜지면 모래는 더 빨리 새어나갈 뿐이다.
나 역시 나의 키 높이에 맞는 행복을 선택해야 된다.
마음은 조르바처럼 살고 싶지만, 여자와의 사랑이냐, 책에 대한 사랑이냐를 두고 결국 책을 택하는 소설속 보스처럼, 나는 절대 조르바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현실을 벗어 날 수가 없고, (지금도) 영혼과 육체와의 싸움에서 늘 이성이 이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동하는 삶으로 자신을 바꿔가고자 하는 소설속 보스나, (조르바 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량노인 세키켄테이 영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중요한 건, 지나간 과거도, 다가올 미래도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하려면 지금 실천해야 하고, 더 시간이 흐르면, 삶의 의미를 더 늦게 깨달으면, 그땐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현실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가 조르바 같은 자유를 꿈꾸지만 조르바가 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클린트 이스트우드, 존 웨인, 리반 클리프가 연기하는 서부영화를 보며,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을 가져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목줄 같은 관념들에 억매여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내면에서 갈등하며 살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
당장 내려놓자. 더, 더...그러면 몸이, 마음이, 삶이 훨씬 가벼워진다.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은 여행과 꿈, 사랑, 그리고 책이다.
나 역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통해 삶을 배우고, 자유가 뭔지 깨닫지 않았는가.
나도 조르바처럼, 니체처럼 대지에 충실하고 싶다
내가 떠남을 망설이고 있을 때,
“뭘 고민하세요, 그냥 훌쩍 떠나면 되는 거지, 왜? 왜? 이런 것 따지지 말고 그냥 빨리 갑시다.” 하고 조르바가 재촉해주면 좋겠다.
그래, 가자.
크레타 섬이든, 어디든,
그 떠나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르바가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짜라투스트라가 니체의 이상을 대변한 자신의 분신이었다면, 조르바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분신, 그도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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