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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 감사.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5. 9. 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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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입니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을 여니 창턱까지 올라온 키 큰 광나무 잎에 빗방울이 맺혀있네요.
모르는 새 비가 왔나봅니다. 
광이 나서 광나무인데, 매끄러운 잎은 햇살이 좋은 날은 반짝반짝 빛나고, 비오는 날은 동글동글 빗방울을 맺는 잎 두꺼운 늘 푸른 나무입니다.  

자세히 보니 잎가지 맨 끝  손가락을 편 듯한 열매가지에 빨갛고 검은 쥐똥같은 열매들이 달려있는데, 검은 것이 익은 것 같습니다. 
비가 와서 그럴까요?, 가을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키 큰 이 나무를 수년간 눈 아래 보아왔는데 오늘 새삼스럽게 그 열매가 눈에 띈 것입니다. 

9월 1일
아직은 덥고 여름이 가려면 한 달이 남았구나 생각했는데, 9월 부터는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네요. 
3,4,5 봄, 6,7,8 여름, 9,10,11 가을, 12,1,2 겨울
그러고 보니 오늘 내린 비는 첫 가을비고, 이번 가을은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때문인지 오늘 비와 바람에는괜히       선선함이 묻어있는 것 같고,  가을을 좋아하는 내가 가을 인사라도 해야 될 같아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가을이면 견디질 못합니다. 
오늘 비를 가을비라 우기듯이, 푸른 잎 가운데 탈색한 나뭇잎 하나를 두고도 단풍이라고 우기고요. 황톳빛 낙엽 밟은 소리를 들으러 일부러 낙엽쌓인 숲길을 걷기도 합니다.
어쩌면 옆구리가 허전한 중년이 더 더 쓸쓸해짐으로써, 습기 없는 맑은 영혼이 되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아무 글이나 막 써댔으니 과연 나는 가을 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가을이 되어도 요란스럽지 않으렵니다. 
매화가 피기 전부터 매향을 기다렸고, 아카시아 향기,하얀울타리에 빨간 줄장미, 5월의 장미보다 더 붉은 유월의 장미를 노래했지만 이것들도 다 스쳐 지나가 버렸습니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있고, 떠나갔지만 다시 오고 만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요.   

지금 있는 건, 오늘과 지금입니다.  
무더운 여름이 9월까지 이어지더라도, 가을이 가을답지 않더라도, 이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지금을 열심히 살려 합니다. 
요란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지극히 평범한 오늘,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지인으로부터, ‘보통의 일상이 너무 그립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밖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 환자를 간병하며 하루를 보내는 가족이 바라는 건, 화려한 것, 신나는 것, 맛있는 것도 아닌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입니다. 
당해보니, 가장 행복한 것이, 별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다는 것이지요. 

어제는 결혼한 아이들이 찾아와서 시원한 밀면에 만두 두 알씩 먹었는데, 모두가 행복해했습니다. 
배나온다고 밥 대신 계란하나에 단 호박 한 조각, 요플레에 넣은 통 곡물, 들깨 섞은 꿀 한숟가락으로 아침을 때워도 진수성찬입니다. 
그런 자식들이 고맙고, 매끼 신경써주는 아내가 고맙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직장에 출근할 수 있음이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삶에 지친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은, 그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더 좋고요, 뭘 더 바라고, 더 시기하고, 다툴 일이 없음이 감사합니다. 
가을은 담백해서 좋듯이, 가을의 나이가 되어보니 스스로 익어가는 것 같아 좋습니다. 
"오늘은 비도 오는데 라면에 김밥 어떻습니까?" 같이 점심먹으러 가는 동료가 제안합니다. 
밖에 나오니 그친 줄 알았던 빗줄기가 굵어지고, 혼자쓰기 아까운? 큰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라면에 김밥 반줄이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은 멋진 한끼였고, 퇴근 길, 누군가 '비오는데 막걸리 한잔 하자'고 전화오면 좋겠습니다.  
가을을 맞으며,
저는, 오늘도 이런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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