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독거노인이 되었다
물론 3일, 10일 (아내가 해외여행을 간다든지 하는 경우) 본의 아니게 독거노인이 된 적도 있지만 가끔은 이런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내겐 48년이나 되는 멋진 친구들이 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서울에 유학가서 만나 같은 반에서 3년을 지내고, 나중에 직장도 모두 같은 곳에 다녔으니 그 우정과 친밀함이야 혈육보다 깊다.
젊은 시절엔 살기위해, 성공하기 위해 죽을 똥 살 똥 일했다.
그러나 60+의 시간이 되면서 일이든 자녀문제든, 이제 바쁜 것과 무거운 책임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나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이의 최대 화두는 ‘어떻게 인생을 즐겁게 건강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뭐하셔? 별일 없으면 한번 볼까나?”, “점심이나 저녁 만들까?”
“나는 OK”,
“나도 ㅇㅋ, 장소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쉬는 날 오전 10시쯤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런 문자가 날아온다.
만나서 ‘스크린 골프치고, (내기 해서) 밥 먹고, 한잔 하자’는 이야기다.
이런 일들은 개인 약속이 없는 한 이루어지고, 아내 역시 친한 친구들끼리의 모임에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친구들 문자가 오지 않는 날엔 “오늘은 아무도 안 부르네?”하고 오히려 의아해 한다.
물론 친구 아내들과 같이 모여 맛집에 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한다.
(어떤 땐 같이 식사 후 아내들은 카페에서 수다떨고 남자들은 그 시간에 또 스크린골프를 친다)
그런데 요즘은 힘이 빠졌는지 골프도 영 시원찮다.
물론 재미로 하는 것이기에 이기나 지나 상관이 없지만, 이왕이면 골프가 잘 되면 재미있고, 안 되면 그만두고 싶어진다.
골프가 안되는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친구들은 지금도 연습장에 가서 꾸준히 연습을 하지만, 나는 15년 넘게 한 번도 연습장에 가본 적이 없다.
24년 골프를 쳤고, 나이에 비해 거리도 많이 나고, 남들도 '잘 친다'하니 굳이 연습까지 하며 더 잘 칠 필요가 없어서다.
그래 놓고선, 샷이 무너지고 성적도 안 나오면 ‘이걸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
"우리 맨날 이렇게 공기순환도 안 되는 갑갑한 방 안에 갇혀 서너 시간 보내는게 맞나? 좀더 의미있고 생산적인 활동은 없을까?"
물론 스크린 골프치고, 밥 먹고, 한잔하는 것도 재미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이것은 쾌락 위주의 '소비적 활동'이다.
“그러면 뭐 하고 싶은데..?”
“글쎄,...가끔 등산도 하고, 봉사활동도 있을 거고, 독서모임을 한다 던지 ...”
.
.
.
지난 주말엔 한 친구는 외국에 가고, 아내 역시 1박 2일 시골 모임에 가고 나니, 나는 (잠시) 오갈 데 없는 독거노인이 되어 버렸다.
식사는 만들어 놓은 국에 밥 한 숟갈 말아 선 채로 후루룩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귀찮게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낼 필요도 없다. 늘 그래왔다 (내가 진짜 독거노인이 된다면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ㅎㅎ)
아침을 먹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다.
아내도 없는 오늘 같은 날 친구들과 스크린 하기에 딱좋은 날인데... 아쉽게도 놀아줄 친구가 없다 .
날씨는 좋고 집안에 갇혀 있으려니 갑갑해서 일단 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목적지는 없이 단풍구경도 할 겸 밀양 삼랑진쪽으로 한 바퀴 돌고 올 예정이다.
점심은 길 가다가 짜장면 집이 보이면 들르든지, 삼랑진 시장에 파는 계란빵 등 군것질로 때우면 될 것 같다.
시간도 많고 목적지도 없으니 여유롭다. 속도를 낼 필요도 없다.
뒤차가 오면 비켜주고 ... 천천히 산천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녀도 되는 자유를 만끽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런 내 행동이 방랑벽인지, 호기심인지, 외로움인지는 모르겠다.
혼자 일본 등으로 훌쩍 떠날 때는 방랑벽이 아니고 ‘호기심’이라고 주장 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방랑벽’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길 떠나면 나는 신난다.
밀양을 한 바퀴 돌아 삼랑진 재래시장에 들른다.
나는 이런 시장 풍경이 좋고, 이런 군것질이 즐겁다.... 뭔가 여기서 향수 같은걸 느낀다.
계란빵, 바나나빵, 국화빵, 옥수수빵, 옥수수 삶은 것, 뻥튀기, 단감 ...
외국인 근로자들이 옥수수 가격을 물어보곤 비싼지 그냥 간다.
(교회에서 외국인근로자 한글 교육도 하는데 ... 가버리고 난 뒤에야 한봉지 사 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계란빵 1개, 국화빵 한 봉지 ... 오늘 내 점심이다.
국화빵을 입에 물고 차를 돌려 나오려는데 '만어사'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익히 들어왔고, 몇 번 가려했다가 못간 곳이다.
“그래 만어사에 가보자”
가을이 오는 들판과 감이 빨갛게 달린 산길을 지나 만어사에 이르렀다.
만어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저멀리 삼랑진 들판과 낙동강이 보이고 그 너머엔 몇 겹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있다.
만어사 아래 산비탈엔 커다란 바위덩어리(암괴)들이 너비 100m, 길이 500m에 걸쳐 널부러져 있다.
자신의 목숨이 다한 걸 안 용왕의 아들이, 신통한 스님의 조언에 따라 길을 떠나자 수많은 물고기가 뒤를 따르고, 이곳 만어사에 이르러 스님은 미륵이 되고 수많은 물고기는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돌을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내가 직접 두드려 보니 과연 신기하게도 큰 돌에서 맑은 종소리가 났다.
산길을 걸어보고, 빨갛게 익은 감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바위에 앉아 생각에도 젖어본다.
일요일엔 전교인 체육대회에 참석하였다가 좀 일찍 나와서는 인근의 내원사 계곡을 걸었다.
보슬비가 오는 산사엔 고요함이 쌓여있고, 계곡엔 푸르고 맑은 물줄기가 흐른다. 벽계수(碧溪水), 옥수(玉水)다.
오늘 나는 혼자 걷는 게 아니었다. 내속의 나와 함께 걷고,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괜히 마음이 바빠진 걸 느낀다. (물론 몸도 바쁘다)
걱정도 없는데 (특히 노후문제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조급해지고 쫓긴다.
월요일엔 학교 모임에서 OO 회장을 맡아달라고 밀어부친다.
화요일은 사회친구가 오랜만에 소주한잔 하자는 연락이 와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요일엔 지난여름 시모노세키 갈 때 만났던 일본 분들이 부산에 여행 왔다기에 자갈치 횟집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부산 야경을 구경시켜주느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목요일엔 이분들과 또 점심을 함께 하고, 흰여을 마을을 같이 둘러봤다
독거노인이 된 토요일엔 혼자 드라이브를 하고, 저녁에 대학원 동기 연구소에 들러서 사이버대학에 입학해서 한글교사 자격증 취득 문제를 협의했다.
일요일엔 교회 행사에 참석하고, 보슬비 내리는 내원사 계곡을 걸었다.
욕심일까? 노후에 대한 걱정일까?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 사는 게 이렇게 늘 바쁘다.
친구가 외국에 가지 않았다면 분명 스크린모임을 했을 것이고, 일본 손님들이 오지 않았다면 또 누구와 약속해서 저녁 먹고 소주도 한잔 했을 것이다.
가만히 보니 ... 내가 문제다. 남이 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나서서 만든다.
꼭 이래야 하나?
이런 바쁨들 중에, 의미 있고 실속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발이 넓고 오지랖마저 넓으니 건수도 많고, 지난 주 봤으면서도 이번주 또 보려니 횟수도 잦고, 밥 먹고 한잔하고 비용은 비용대로 몸은 몸대로 상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일, 비 합리적인 일, 어떤것에 중독.포로가 되는 일, 의무감에 마음에 없으면서도 끌려다니는 일,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 .... 이게 과연 생산적인 활동일까?
하지만, 나는 분명 보통사람이고 구도자가 아니다.
한번뿐인 인생을 실컷 즐기고 싶고, 죽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랑도 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매사를 소비적이니 생산적이니, 실속이 있느니 없느니 따지는 건 맞지않다.
이 나이에 같이 놀 친구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만약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가뭄의 논바닥처렴 매말라 갈라져 있을 것이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인생을 심심치 않게, 젊게, 신나게 살고, 살맛이나는 것이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진정한 위로가 되고 도움을 주는 친구,
나를 늘 웃게 만드는 그런 친구들과, 까불며 놀고, 맛있는 것 먹고, 같이 여행가는 것.
거룩이니 철학같은 거대 담론보다, 이것이 인생에 훨씬 더 현실적이고 실속있는 일 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바쁘게 살고 싶지 않고, 여유롭게 천천히 인생을 음미하고 즐기고 싶다.
그럼에도 가끔 떠오르는 조금의 아쉬움.....
지금처럼 친구들끼리 즐거운 일을 더 많이 많이 도모하되 .... 좀 더 의미있고, 보람되고, 건강한 일은 없을까?
생산적이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
기분도 좋고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일.
내 인생에서 고상한 향기가 나는 일.
일과 삶의 균형, (Work and Life Balance)
많은 일들을 만들고, 많이 즐기고, 빠른 속도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 만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은 아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인생은 즐기는 것이 최고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잡다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줄이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해질녘 노을도 바라보자.
난 어제 오늘 혼자 여행을 하면서, 맑음속에 느긋함을 즐기고, 나 자신과의 대화도 나눴다.
소비위주의 '실속 없는 바쁨' 보다, '실속 있는 여유'를 즐긴 시간,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속에 느슨하게 자신을 풀어놓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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