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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로니에는 ....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10. 2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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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콩고물을 뿌려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은행나무 낙엽들

2007년 가을
(1급 비밀도 아닌데) 사정상 때론 내가 뭘 하는지 알리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새벽에 나와 숙제??를 해놓고 그제서야 아침을 때우러 간다. 
그것도 내게 주어진 겨우 40분 정도의 아침 식사시간 중에 다믄 커피라도 한잔 편안하게 마실 시간을 만들기 위해 밥은 마시듯이 먹고, 먼저 신문자판기에 500원을 넣고 신문을 뽑았다 

퉁! 
그런데 자판기에서 떨어진 신문의 톱기사가 많이 본 듯하다
아뿔사 ~ ! 
어제 토요일 신문이다 
“그렇지 오늘은 일요일이라 휴간이지......어이구 이 멍청한 친구야~”
이런 놈이 무얼 배려한다고, 누군가 심심하면 보라고 벤치위에 두고 온다. 

연휴기간에도 쉬지 못하고 6박7일 서울 출장을 왔는데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한일 친선교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노래 가사에서만 듣던 마로니에 공원이 바로 여기란 말인가?
밥맛도 없는 저녁 대신에 마로니에 공원에나 거닐어 보기로 했다
부산에 가서 마로니에 공원에도 가봤다고 하려고 말이다

신호등 앞의 신문가판대엔 일요일 오후인데 월요일자 신문이 나와 있다  
아침의 황당함을 기억하며 다시 신문일자를 확인하고 한부를 사서 들고 길을 건넌다
이게 내일 아침 부산에 배달되는 신문인가?
지방에 산다고 정보마저 늦어야 하나? 
서울과 부산의 차이가 기분 나쁘지만 어쩌랴 그게 현실인 것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길가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정겹다
난 플라타너스를 보면, 초등학교 그네 옆에 심겨져 있던 그 플라타너스가 생각나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노스텔지어? ... 요즘엔 찾기 어려운 플라타너스가 서울엔 이렇게 가로수로도 남아 있다는 게 감사하고, 이것 때문에 촌놈의 말 못할 스트레스와 갑갑함이 잠시나마 풀린다.  

밤의 조명아래 한쪽 무대에선 판토마임과 불쇼가 이어지고 옆에서는 또 다른 국악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무대를 중심으로 둘러앉거나 서서 웃고 즐기고 박수치는 관중들 
한 손에 한국경제신문을 말아든 중년의  남자는 무리에 끼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발돋움으로 혼자 미소 지어본다

마로니에 공원 뒤 골목은 대학로하고 했다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는데 극단 직원들이 개그콘서트 안어벙이 출연한다고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전단지를 나눠준다
근데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옆 건물에선 다른 개그콘서트 멤버들이 출연한다고 또 난리다
여기선 박상민이 나오고 저기선 무슨 연극을 하고.......

짧은 미니스커트의 미끈한 아가씨와 다정한 연인들. 
예쁘고 멋진 건물들과 휘황한 불빛,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밝고 환한 웃음들....
대학로를 기웃거리며 중년의 남자가 신문 하나들고 터벅터벅 걷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 혼자 들어가 커피한잔 마실 마땅한 곳이 없는 것 같아 다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되돌아온다.
20년이 지난다면?  아니 30년이 지난다면?.......
오늘은 그 대학로를 거닐었던 중년의 남자는 신문마저 놓은 채, 마로니에 공원 벤치를 지키는 늙은이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진다.  

일찍 서울에 올라와 탄탄하게 자리잡은 영주친구가 생각났다
"서울 출장 왔는데 시간나면 소주한잔 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놈 짜식! 내가 또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면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사 주겠다”고 답장이 왔다
고맙다. 서울 깍쟁들은 다 바쁘다는 걸 알고 있는데, 나를 위해 기꺼이 귀한 시간 내어주고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잔 사주겠다니 말이다. ㅎㅎ  (세종문화회관 뒤 라이브카페 '가을'엔 그때 찍은 우리들 폴라로이드 사진이 아직 걸려있는지 모르겠다)   
.

플라타너스, 늘 나을 추억속으로 이끈다. 먼데에 대한 그리움, 노스텔지어.


출장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오는데 바깥 풍경이 너무 맑다
높은 산 위로 칠해진 파란 하늘,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
이제사 눈이 열리고, 숨통이 트인다.   
자유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던 짐승이 울타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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