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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중 - 몰두 - 몰입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10. 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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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나름의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시간단위로 정하는 규칙적인 일상생활이 있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내 집 마련을 위해, 건강관리를 위해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자기만의 기준, 원칙들도 있다. 
이런 규칙들이 차질없이 실천하도록 행동을 의식화, 절차화, 일상화, 습관화하는 것이 리츄얼(ritual)이다. 

나는 출근하면 맨 먼저 몇 페이지가 되든 책을 읽고, 몇 분이 되든 외국어를 공부하고, 가끔 글도 긁적여 본다. 
머리가 굳지 않고, 나이가 들어도 도태하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방편이고 리츄얼이다. 

한 때는 책이 좋아 그림 하나 없이 작은 활자만 가득한 900페이지가 넘는 ’인간본성의 법칙‘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  850페이지 3권짜리 '열하일기'도 읽어냈다. 
책에 빠져들고, 거기에 몰입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기에 가능했다. 
’읽어냈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만... 결국 해 냈다는 이야기다. 
이 나이에 어쩌면 ’인간승리‘다 ㅎㅎ.

또 한때는 전원주택에 온 정신이 팔린 적이 있다. 
언덕 위 창고 같은 건물이었지만, 내손으로 직접 멋진 전원주택으로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꿈은 늘 아름답다. 
오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고, 이곳에서 여유롭게 주말이나 노후를 즐긴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역마살에 방랑기마저 있어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내가 여기에 (잠시) 빠져버린 것이다. 

허름한 건물을 프로방스처럼 꾸미기 위해 인테리어를 검색하고, 설계를 하고, 온갖 자재들을 둘러보는 일도 즐거웠다. 
특히 벽난로를 만드는 일은 당연 압권이다.  
먼저 감성적인 벽난로의 외부 디자인을 정하고, 벽난로의 열기로 온수와 난방까지 겸하는 구조를 혼자 설계했다. 
난방의 개념, 열의 전도방식도 모르는 나의 못 말리는 '무한도전'이다.   

난방원리는 이러하다. 
가정용 가스통을 반으로 잘라 그 안에 코일 호스를 감아 넣고 다시 가스통을 용접해 이걸 벽난로 안에 고정시킨다. 벽난로에 불을 때면 가스통 안의 물이 데워지고, 코일호스를 통해 들어간 냉수는 가스통안의 끓는 물을 지나오면서 온수가 되어 나오는 구조다. 
가슴이 뛴다. 나는 천재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ㅎㅎ

빈 가스통과 코일호스, 철물 부속품들을 사고, 철공소에서 가스통을 자르고 용접하고, 벽난로 외벽을 장식할 파벽돌을 구입하고, 아치형 합판을 대고 그 위에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고  ....  
그 공정들이 장난이 아닌데 이를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장 다니면서 주말에 내 손으로 다 해냈다.
(굳이 결과를 평가하자면 ... 설레긴 했지만 총체적으로 실패했다. 전문가에게 맡길 걸.. )

아내는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 시골에 가는 날은 커피와 과일을 담아주며 
“괜히 무리하다 병 난다. 천천히 쉬엄쉬엄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나는 이런 것들이 참 재미있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설계해보고, 그리고 직접 만들어가는 것.    
생각만 해도 즐겁고, 또 그것들이 만들어져가는 과정들은 더 행복하다. 

이렇게 작업에 열중하다 허리를 펴고 시간을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까 아직 점심도 안 먹었고, 챙겨온 커피와 과일도 안 먹은 채 일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내가 밉다.
"아~ 이 바보, 커피가 얼마나 맛있고, 목마를 때 과일이 얼마나 달고 시원한데 ....."
매사에 열심히 하는 ‘열중 – 몰두’가 아니라, 이건 ‘몰입’을 넘어 건강을 해치는 ‘과몰입’이다. 

그런 나였었는데... 나이 탓일까?, 쉬엄쉬엄하자고 스스로 다짐해서 일까 지금은 책을 읽어도, 공부를 해도 몰입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도 다음 페이지를 먼저 생각하고, 책의 남은 두께를 자주 보게 된다. 
몰입해서 책을 읽고 행간의 의미를 찾기보다, 완독. 책 읽은 권수에 더 신경을 쓴다.  

나는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는 멀티태스커(multi-tasker)인줄 알았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며, 양치질하고, 책도 읽는다. 
운전하면서도 운전대에 단어장을 끼워놓고 외우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할 수 는 없다. 
어제 일과 내일 일을 번갈아 가며 생각할 수는 있어도, 동시에 한꺼번에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에 몰입을 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고, 깊이 들어가야 근본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몰입의 법칙’이다. 
따라서 성공하려면 뭐든지 몰입을 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남녀 미팅프로그램 '나는 솔로'에서 보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고, 이 사람도 놓치기 싫고 저 사람도 놓치기 싫어서 둘 다 챙기려다보면 결국 한 사람도 잡을 수 없다.  
두 사람 모두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두사람 모두에게 소홀하는 것이다.

탐스러운 무화과가 잔뜩 열린 무화과나무 가지에서 굶어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탐스러워 어떤것을 선택할까 고민하는 사이, 무화과가 검게 변하고 다 땅에 떨어져버린 것이다.

삶은 '선택'인 동시에 '포기'다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성공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하고 '몰입'해야한다.

영화 ‘사이드웨이(side way)는 와인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이야기다. 
내가 피노누아(pinot noir) 와인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 영화때문이었다. 

피노누아는 재배하기 힘든 품종이라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다. 게다가 껍질이 얇고 빨리 익어 끊임없는 보살핌과 관심을 주어야만 제대로 자란다.
그런 피노누아를 이해하고, 인내심과 사랑과 시간을 쏟을 때, 마침내 피노누아도 잊을 수 없는 미묘한 맛과 향을 내는 것이다.  

'열중'이고 '몰두'고 '몰입'이 결과다. 

신문 칼럼은 이렇게 마친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나의 피노누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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