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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 희방사의 추억 ....

뚜벅뚜벅 인생여행 (자유 여행기)

by 유초선생 2024. 10. 2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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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챙기려고 전국의 산을 답사하는 친구가 소백산 비로봉에 올랐다고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풍기에서 소백산 비로봉을 가려면 희방사를 거쳐 올라가야 하는데 내겐 그 희방사에 얽힌 추억이 있다.   

1977년 고2 여름방학 때 우리반 친구 몇명이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을 거쳐 희방사로 캠핑을 간적이 있다. 
그땐 배낭을 매고, 기차를 타고, 걸어서 캠핑을 갔다.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경포대 해수욕장 내려선 텐트를 치고 캠핑의 낭만을 맘껏 즐긴다. 
  
캠파이어를 하고 통기타를 치며 ‘연가’를 시작으로 ‘이름 모를 소녀’, ‘모닥불’을 부르다가, 하야비치 소주에 취기가 오르면 고고(GOGO)로 넘어간다. 
‘토요일 밤에’, ‘고래사냥’, ‘나 어떡해’, ‘해변으로 가요’에 ‘beauty sun day’, ‘who will stop the rain’ 팝송까지 이어진다. 
온몸을 흔들며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고고 춤과 다이아몬드 스텝은 당시 7080 신세대의 상징이었다. 
고고 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제일 잘 춘다 ㅎㅎ, 

한바탕 춤판이 끝나고 나면, 취기에 객기까지 넘쳐 모두 일어나 둥그렇게 모여서는 주먹을 쥐고 응원가를 외친다.
고교야구부가 있던 학교라 야구대회 때면 오후수업도 하지 않고 전교생이 운동장에 앉아 응원연습을 했고, 동대문야구장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응원가다.
리더가 ‘아카라카~~!’를 외치면 모두 “아카라카~~!'를 외친다. 
"시작!, 아카라카 칭, 아카라카 초, 아카라카 칭칭 초초초, 라라라 시스품바 C고, C고 빅토리 야 ! 우리는 C고 나간다 싸운다 이긴다 헤이 C고 야!"
뜻도 모르는 응원가 ‘야포이 타이 타이 예( Epoi Tai Tai E )~~.....’
"뜸바떼 뜸바... 알레알레 히~~!........헤이 뜸바!  야!"를 백사장 위에서 남들 보란 듯이 호기롭게 외친다. 
(이 응원가는 나이가 든 지금 외쳐도 힘이 솟고 전율이 느껴진다)

이렇게 한바탕 놀고 나면 고독한 사냥꾼이 되어 하이에나처럼 길 잃은 어린 소녀들을 찾아 백사장을 헤맨다.
그렇게 우리는 광란의 뜨거운 밤(열대야니까?)을 보내고 다음 일정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영주를 거쳐 희방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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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역에 내려 한 짐 배낭을 매고  걸어 걸어 희방사로 가는 길에 어찌 그리 고추잠자리가 많던지....
검지손가락을 펴고 있으면 그놈이 겁도 없이 손 끝에 살짝 내려앉는데, 엄지로 다리 꼭 누르면 금방 잡혀선 날개를 파르릉 파르릉 떨며 놓아 달라한다.  

희방사에 도착해서 텐트치고 아침을 해 먹으려는데 영주전문대? 여자 3명이 우리 옆을 지나며 “연화봉으로 간다”고 한다.
우리는 순간 여자란 동물에 눈이 뒤집히고 피가 끓어(?), 아침밥도 안 먹고 같이 따라가고 말았다.

그런데 희방사 뒷산 중턱쯤 올라가니 배가 슬슬 고파오는데 이거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사나이들인데 배고프다 소리도 못하고 죽을힘을 다해 연화봉에 올라오니 눈이 10리나 들어가 버렸고, 이젠 힘도 빠지고 다리도 후들거리는데, 이 누나(그때는 우리보다 위였으니까)들은 '비로봉까지 같이 가자'고 한다. 

희방사 입구에서 우리 텐트 옆을 지날 때 웃음 주던 청순하고 예쁜 누나들이 이젠 여자로 안보이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만큼 배가 고픈 우리는, 여자고 비로봉이고 다 포기하고 되돌아오기로 했다. 

연화봉에서 빠끔한 눈으로 내려다보니 저기 산 아래 희방사가 조그맣게 보이는데,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너무 멀 것 같아 길도 없는 계곡을 타고 최단거리 직선으로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막상 계곡에 들어서니 이거 장난이 아니다. 
길도 없고 하늘도 없고, 온 천지가 칡넝쿨로 밀림처럼 얽혀있다. 
진퇴양난, 앞으로 계속가기도 그렇고, 다시 등산길로 돌아가기에도 이미 늦었다. 
“그래 가보자 계곡 아래 분명히 희방사가 있다.”
하는 수 없이 중력에 몸을 싣고 아래로 아래로만 몸을 던진다. 

온갖 넝쿨에 전신이 긁히고 이끼에 미끄러지고 .... 이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고 진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리얼리티'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무한도전’이 아니라 ‘무식한 도전’이다.

마침내 너덜너덜한 몸으로 희방사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눈에는 먹을 것  밖에 안 보인다. 
가난한 학생들이 캠핑을 갔으니 빵이라든지 먹을 것도 전혀 없었고, 가진 것이라곤 쌀과 라면뿐이다.
밥을 하려면 시간이 걸리기에 우선 생 라면을 그냥 부쒀 먹고 물을 마시고 나니 이제 눈이 뜨이고 세상이 보인다. 
“그 여자분들 비로봉까지 잘 갔을까?” ㅎㅎ

지금부터 45년 전,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다.
그 추억의 희방사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친구의 소백산 비로봉 등정 사진에 그때의 추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래, 돌아가고 싶은 ... 참 좋은 시절이었다. 
오직 젊음만이 또는 배고픔만이 해 낼 수 있는 모험이고 투혼이었다.  
그때의 고추잠자리, 희방사, 희방폭포는 그대로 있을까? 

풍기가 고향인 친구가 희방사 근처인 자기 고향자랑을 또 한다.
풍기에 부는 바람은 인삼향이 묻어 있다든지 ....우리집 기본 반찬은 인삼 잔 뿌리 무침이라든지 ...
이 가을,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희방사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친구의 댓글은  더 나아간다)
유초거사가 이렇게 장문의 글을 올렸는데, 그것도 손수 쓴 수필인데 그냥 읽고 나가버리면 양심불량이지?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이 몇 자 덜렁 적을 수 없잖니.

유초의 주제는 "솟구치는 욕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참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귀결되는 것 같네.
결국 이 문제는 인류탄생 이래로 지금까지 진행 중인 화두가 아닐까.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실천과는 별도로) 일부러 "가슴을 보인 여인"에게 "죽으면 썩을 삭신 뭘 그리 들 아끼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고, 또 체면이라는 위선 때문에 감추고 애만 녹다가 가는것이 인생사 아니겠는가.

통계에 의하면 "46세에 간통죄에 많이 걸린다"라고 하니
우리 때에 이것만 조심하고 즐길 수 있으면 즐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다만 이러한 행위도 자기철학에 밑바탕을 둔 육체적 쾌락이어야지 맹목적인 일탈은 곤란하다고 봐야지.....

(유초는 고등학교때 친구가 지어준 호(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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