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토 시장에서 초밥도 실컷 먹었으니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달성했고, 이제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나머지 여행을 하면 된다.
시모노세키의 여름도 덥다.
이 더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앞으로 여행의 최대 관건이다.
이제 멀리 보이는 간몬교를 향해 걸어가면서 연도에 있는 조선통신사 상륙지 – 아카마신궁 – 우즈하우스(게스트하우스)에 둘러보고 갈 예정이다.
여행은 걷는 것이다. 걸으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걸어갈 때 사람도 만나고 여행지의 속살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추억은 온통 더위다, 더위로 시작해서 더위로 끝났다.
물건을 사면 내 것이 되어 늘 같이 있게 되고 금방 그 물건에 익숙해진다. 그러다보면 다른 것들과 또 비교하게되고 얼마가지 않아 매력이 사라지고 싫증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여행은 경험을 구매하는 것이다.
개고생을 했더라도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땐 더웠지만, 글을 쓰는 지금 벌써 그때의 더위가 다시 경험 못할 소중한 기억으로 남으니 말이다.
500m쯤 가니 바닷가에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가 보인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전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조선 후기인 1811년(순조 11년) 까지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외교, 문화사절단이다.
당시에는 엔진을 단 선박도 없었고, 돛과 노를 이용한 목선 6척에 300~500명의 사절단들이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류하였다니 그 규모에 놀라고, 또 한양(서울)에서 '에도(동경)'에 도착하는 기간만도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니 국가적차원에서 준비한 행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항해기술도 없었을 텐데 망망대해를 거쳐 대마도에 이르고, 다시 항해를 해서 이곳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과정은 어쩌면 목숨을 건 항해였을지도 모른다.
이곳 해협이름이 간몬(관문,関門)인 것처럼, 시모노세키 간몬해협은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가 들어오는 관문이고 무역, 물류의 중심지다.
상륙지 앞의 간몬해협 파도는 강물처럼 조용히 바닷가 기슭에 찰싹인다.
여기서 부터는 일본 내해(內海)이기 때문에 파도도 잠잠하고 항해가 수월했을 테니, 이곳에 도착한 통신사들은 이제사 안도의 한숨을 놓고 마음 편히 쉴 수 있었으리라.
상륙기념비 옆엔 몇 그루 소나무와 벤치가 놓여진 것이 작은 동네공원 같지만, 나에게는 그 역사적 장소라는 사실에 감회가 새롭다.
상륙기념비 맞은편 도로를 건너면 바로 아카마 신궁이다.
도로가에 세워진 커다란 석물 도리이와 언덕 위 빨간색 신궁이 여행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카마 신궁은 일본 헤이안시대(고려 중후기)에 일본내전인 겐페이전쟁(1180년~1185년)으로 5세 때 죽은 안토쿠천왕을 모시는 신사다.
도리이를 지나 언덕을 조금 오르면 흰색 아치위에 붉은 색 누각을 얹은 수천문을 만난다.
여기서 바라보면 조선통신사기념비와 간몬해협이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아주 좋다.
그 뒤로 본전과 배전 등 여러 신궁건물들이 있다.
이 더운 날씨에도 관광객들이 올라오는데 모두 지쳐있다.
중국어를 쓰는 것을 보니 중국인이나 대만인인 것 같다.
조선통신사 기념비 바로 앞이 우즈하우스다.
도로와 바다사이에 공간도 없이 딱 붙게 지은 게스트하우스다.
나도 이곳에 숙소를 예약하려다 시내에서 멀어 예약을 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가 어떤곳인지 이것저것 물어보려다 날씨도 덥고, 다음에도 올 일이 없을 것 같아 눈으로만 둘러 보고 지나친다.
날씨 진짜 덥다.
모지코로 가기전 먼저 일본 전통마을인 쵸후 마을을 둘러본 후 모지코로 넘어가려고 버스정류소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이쪽인가? 저쪽인가? 주민 한분이 지나가길래 물어보니 "길 건너 아카마신궁앞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한다.
'아닌데? ... 쵸후마을은 이쪽에서 타야하는데? ....'
'아차 .... 그래 여긴 일본이지, 차량은 좌측통행이기 때문에 저기서 타는 것이 맞네 ㅎㅎ'
길을 건너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니 2시 반이 넘었다.
지금 쵸후마을에 들렀다 모지코로 가면 늦을 것 같아. 아쉽지만 쵸후마을은 포기하고
바로 간몬 해저터널로 가기로 한다.
저만치 간몬교가 보이고, 그리 멀지도 않은 것 같아 걸어가도 될 것 같다.
다행히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분 2분도 간몬 해저터널까지 걸어가는 중이라 한다.
‘그럼 나도 걸어야지’
간몬해협을 걷는 풍경은 간몬교가 메인이다, 바다지만 강처럼 물결이 잔잔해, 동해안 처럼 파도가 쳐 포말이 일어낙고, 모래사장이 있고, 꼬불꼬불한길 기암괴석위에 갈매기가 앉은 모습은 없어 풍경은 비교적 단조롭다
아~~오늘 진짜 덥다.
바지는 다리에 칭칭 감기고, 면 티는 땀으로 젖는다.
'더위먹으면 안되지 ...' 걸음을 멈추고 주택 옆 그늘에서 숨을 고른다.
해협에서 집사이 골목으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좀 통통한 딸과 야윈 어머니는 이 더위에도 쉬지 않고 잘 걷는다.
내가 쉬면 그들이 앞서고, 내가 빨리 걸으면 또 그들을 앞선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중국인도 쉬지 않고 잘 걷는데, 내가 약한 건가 여자 분들이 강한건가?
드디어 간몬교 밑에 왔다. 올려다보는 해협을 건너는 철교가 기하학적으로 정교하고 멋있다.
간몬교는 시모노세키와 모지를 잇는 현수교로, 간몬교라는 이름은 두 지역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총 길이 1,068m 현수교 교량으로 1973년 개통 당시는 일본 최대 규모의 다리였다고 한다.
특히 현수교 줄을 매단 지간(기둥)과 지간사이가 712m나 되고, 그 높이가 바다 위 61m나 되다보니 아무리 큰 배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어 ‘천국의 계단’이 아니라 ‘하늘다리’같다.
내가 토목이 전공이라 교량의 트러스의 구조도 한 번 더 살펴보고, 교량 하부에 설치된 교량보수용 모노레일장치로 이동하면서 보수하도록 해놓은 구조물이 특이하다.
다리 밑 그늘에서도 바닷바람에 잠시 땀을 식힌다.
해저터널까지는 앞으로 200m쯤 더 가야한다.
간몬교 좀 지나면 바로 미모스소가와 공원이 있다.
오른쪽 바닷가에 일본무사 2명이 칼과 닻을 짊어지고 격투를 벌이는 듯 마주하고 있는 조형물이 있다.
이곳이 헤이카 가문이 몰락하고 요리토모가 카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계기가 된, 단노우라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다.
동상은 두 진영의 장수로 칼을 든 사람이 '요시츠네'고 닻을 든 사람이 '토모모리'다. 칼을 든 요시츠네가 이겼다.
바로 옆엔 다섯 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역사이야기를 하자면 .... )
에도막부(1603년~1868년, 조선 중후기 선조~고종)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막부다.
일본도 에도시대에 조선과 같은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4척의 함대를 끌고 와 무력으로 개항을 요구하고 ,1954년 다시 7척의 함대를 이끌고 와 개항을 요구하자 에도막부는 무력충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평등 조약인 1854년 미일친화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써 먹은 그대로 1876년 한반도에 들어와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는 '막번체제'가 있다. 중앙정부인 '막부'가 있고 지방정부인 '번(반, 藩)'이 있다.
'번(藩)체제'는 봉건제도처럼 막부시대 영주(다이묘)가 다스리던 영지와 지배기구다.
당시 번(藩)국의 영주인 다이묘의 권한은 막강하여 자체 군사력을 가지고, 무역을 하고 , 권력도 세습하는 등 독립성이 강했고, 그러다 보니 번(藩)체제가 봉건제라기보다 오히려 초기 근대국가, 일종의 연방국가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가지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4개 번은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 사가번 인데 , 조슈번만 일본 본토인 지금의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에 위치하고 나머지는 섬인 큐슈와 시코쿠에 있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지금의 부를 이룬 배경에는, 임진왜란 때 붙잡혀간 한국의 도공들이 큰 역할을 했다.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비밀들’(조용준)에서 보면,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도공 심수관이 ‘사쯔마야키(사쯔마산 도자기)’를, 이삼평이 ‘아리타야키(아리타산 도자기)’를 완성했다.
사쯔마 번에서는 이 도자기들을 유럽 만국박람회에 수출해 떼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최신식 군함과 무기를 수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도자기가 최신식 무기로 둔갑한 것이다.
이렇듯 일본 근대화와 발전의 기저에는 한국도공이 만든 도자기가 자금줄이 되었고, 그래서 일본은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번(藩) 에서는 막강한 자체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1858년 미일통상조약 후 일본의 쇄국정책은 무너졌다. 일왕은 화친조약이든 통상조약이든 반대했고, 막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침)를 내세우며 개항을 반대하고, 그 기운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막부는 영국에 배상금 44만 달러를 지급한 후 양이(쇄국, 즉 오랑캐를 물리침)를 실행하기로 하고, 개항장 폐쇄 및 외국인 퇴거를 통보했다가, 이후 다시 폐쇄를 철회했다.
이에 반발한 시모노세키를 거점으로 한 조슈번은 존왕양이를 독자적으로 실천하기로 하고, 시모노세키 앞 바다 간몬해협에 포대를 설치하고 1,000명 정도의 군대를 주둔시키며 해상봉쇄를 추진한다.
이후 정박하는 미국상선, 프랑스선박, 네덜란드 상선등에 해안포와 군함으로 포격을 함으로써 선박이 손상되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미국은 요코하마 항에 입항해 있던 와이오밍 군함을 출항시켜 조슈번 군함에 포격하여 2척을 침몰시켰고 한척은 크게 파손시켰다. 프랑스 역시 35문의 포를 장착한 대형 군함 세미라미스호로 맹포격을 가한 후 조슈번 포대를 점거하고 대포를 파괴했다.
조슈번은 그때서야 서양의 군사력을 실감하고 양이가 불가함을 깨달았지만, 이후 다시 포대를 복구한 후 해양봉쇄를 계속했다.
작은 지방번에 불과한 조슈번이 서양 4대강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 것이다.
여기 전시된 대포가 바로 조슈번에서 서양 상선과 함대를 향해 포탄을 퍼부었던 그 대포들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쇄국은 했지만, 이후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고,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도 분명히 있다.
한편 그 발전이 원동력이 한국의 도자기와 한국에서 전한 은제련기술이었다는 사실에 내심 자부심도 느낀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책을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2023년 혼자 떠나는 북큐슈 기차여행을 갔을 때도, 그 당시 네덜란드에만 주둔을 허용하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던 역사의 현장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기꺼이 방문했다.
이런 역사의 흔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고, 그 흔적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적 있는 여행, 의미있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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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간몬 해저터널 입구에 도착했다.
'후 ~ ~ 차라리 버스를 타고 올걸 그랬나 보다'.
우선 자판기에서 찬 음료수 하나를 빼 벌컥벌컥 마시고는 세면장에서 타올을 물에 적셔 목에 두른다.
청면티셔츠는 땀과 물이 흘른 자국으로 젖었다.
멋이고 체면이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해저터널 입구가 나온다.
해저터널은 간몬해협 바다 아래 해저 깊이 55m, 길이 780m로 건설한 시모노세키와 모지코를 잇는 해저터널이다.
1939년에 착공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는 등의 어려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8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해저터널 상단은 차도(폭 7.5m)이고, 하단은 보행통로(폭 3.8m)로 나는 걸어서 모지코로 넘어갈 계획이다.
터널 박스 바닥은 노란색 에폭시 도장위에 흰색 중앙선이 그어져 있다.
좌우 벽과 천정은 푸른빛으로 바다를 연상하게 한다.
터널로 걸어가는 지하 입구에는 같이 걸어왔던 일행들도 가뿐 한숨을 쉬며 사진을 찍고 기념 스템프에 도장도 찍는다.
나는 이미 지쳐 노트를 꺼내 여행기를 적을 생각도, 오즈모로 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스템프를 찍는 것도 포기하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진만 찍어둔다.
이제 해저터널로 들어간다.
네모 난 박스의 네 귀퉁이가 하나의 점으로 모아지는 것이 마치 미술시간에 그렸던 투시도를 보는 것 같다.
터널의 중간지점까지는 약간 내리막이고 중간지점에서 모지코 까지는 오르막이다.
일단 터널 안은 바닷속이라 시원하다.
아이들은 힘들지도 않는지 앞으로 뛰어갔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초로의 남자는 이곳에서 계속 ㅆ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더운데 이곳에서 운동할 생각은 잘 한 것 같은데 공기가 더 나쁘지 않을까?
터널 중간쯤에 후쿠오카 현과 야마구치현의 경계표시가 있다.
사진 한 장을 찍어둔다. 나는 걸어서 간몬해협을 건넌 사람이다.
모지코에 도착해 터널 밖으로 나온다.
모지코쪽 해저터널 건물도 시모노세키 건물과 똑같다.
바다 쪽에 석물로 된 큰 도리이가 서 있고 조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간몬교가 해협을 건너고 있다.
여기서는 내가 걸어온 유메타워부터 가라토 아카마신궁 시모노세키쪽 간몬터널 쪽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장관이다.
이제 모지코 레트로로 가야한다.
버스를 탈수도 있고, 좀 멀 것 같지만 잘하면 걸어갈 수 도 있을 것 같다.
모지코로 가려면 다시 간몬교 밑을 지나야 한다.
간몬교 아래 바닷가에 유튜브에서 봤던 작은 신사가 있어 들르기로 한다.
부산 기장의 해동용궁사처럼 바닷가에 세워진 메카리신사.
아카마신궁처럼 붉은 단청도, 큰 건물도 없지만 세월의 때가 묻은 작고 담백한 신사다.
소란스럽지 않은 단출함, 자극하지 않는 차분함이 말차 같이 와비(わび・侘)의 미(美)를 더하고, 검게 스며든 신사건물은 그윽한 묵향처럼 오히려 기품이 있다.
바다를 향한 섬돌을 내려가면 바다 속 작은 바위 위에 석등하나가 망부석처럼 서있다.
따개비를 두른 채 해협을 바라보는 석등에선 간절한 염원의 기도와 영검함이 느껴진다.
신사 안을 가로질러 나가면 다시 도로로 이어지고, 멀리 모지코가 보인다
또 발이 아파온다.
‘버스를 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눈은 자꾸 도로 쪽을 바라보게 되는데 여기에도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바닷가 쪽으로 길이 나 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슬슬 무게를 더해오는 다리는 자꾸 지름길을 찾게 된다.
한참을 가다보니 철길이 나온다. 철로에 잡초가 우거지고 철도 건널목을 지키는 간수도 없는 걸 보니 폐선처럼 보인다.
철길 앞쪽이 건물들이 있는 시가지 쪽이고, 나는 지름길처럼 보이는 철길너머 방파제 길을 택해 간다.
두 어부가 뙤약볕 아래 작은 배위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곤니찌와” .....
철로위에 기차가 지나간다. 장난감 같은 기관차에 달랑 객차2량만 달고 달려가는데 귀엽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지코 레트로 관광열차였다.
싱긋이 웃어보며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아예 신발을 벗고 벤치에 드러눕는다.
이 더위에 걸어서 여행하다니 무리다.
물론 가는 곳곳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도 많이 봤지만 약간의 한계도 느껴진다.
버킷리스트에 담긴 산티아고 길을 걸으려면 하루에 20km씩 한 달 이상을 걸어야 하는데, 이 저질체력으로 가능하기나 한 걸까?
지도를 보니 바로 앞 큰 건물인 모지메디컬 센터이고, 그 너머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모지코레트로 전망대인 것 같다. 조금만 가면 된다.
드디어 모지코레트로에 도착했다.
1889년 개항한 모지코항은 간몬해협을 끼고 시모노세키규슈 맞은편에 위치한 국제무역항이다.
에도말기와 다이쇼시대(1912년~1926년)에 외국무역으로 번성했던 이곳에 JR모지코 역을 중심으로 당시의 외국상사나 해운회사들이 사용했던 서양식 복고풍의 건물을 복원해 하나의 거리로 조성해 놓은 관광지다.
한편, 모지코는 18년 전 쯤 내가 다니는 교회와 후쿠오카 히라오교회간 자매결연을 맺고, 교인들이 서로 방문하여 홈스테이도 하고 교류할 때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 여행하면서 나 자신에게 휴식을 주지 않는 것은 학대다.
우선 덥기도 하고 땀도 식힐 겸 기념품 가게 ‘카이몬시장’에 들른다.
관광지의 기념품 가게는 늘 그게 그거라 별로 살 것은 없고 걷는 여행에 물건을 사면 또 짐이다.
기념품 가게 바깥의 ‘앵커 1889’에 들어간다.
1889는 모지항이 개항한 년도인데, 카페이름으로 멋지게 차용했다.
커피대신 시원한 생맥주를 주문한다.
일본은 역시 나마비루(생맥주)다. 목 넘김이 최고다.
시원한 에어콘 밑 여기가 천국이고 더위속의 생맥주는 천국의 음료다.
나가기 싫다. 그래도 가야지, 여행왔으니까 ...
18년 전에 못 봤던 높은 현대식 건물 모지코레트로 전망대는 아마 새로 지은 것 같다.
전망대에 올라가보려고 현관까지 갔다가 시계를 보니 4시 반이 넘었다.
철도박물관도 가야하는데, 올라가 간식이라도 먹으면 일정이 안 맞을 것 같아 우선 레트로 건물을 둘러보고 철도 박물관으로 가기로 한다.
복고풍 서양건물인 키타큐슈-다렌 우호기념관, (구)모지세관을 지나 블루윙도개교를 건넌다.
이전에 왔을 땐 다리를 들어 올리고 배가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오늘 그 시간이 아닌가 보다.
모지코역 옆쪽으로 자그맣고 예쁜 카페, 식당들에 눈길이 갔지만, 벌써 오늘 하루 시간에 쫓긴다.
큰 광장옆에 큐슈철도기념관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옆에 복고풍의 서양식 건물이 있어, 여기가 철도 기념관인가보다 하고 들어가 본다.
건물 안은 천정이 높고 유럽복고풍으로 인테리어를 한 웅장한 호텔로비 같다.
‘여기가 어디냐’고 했더니 모지코역이란다. (시내쪽엔 현대식 건물인 모지역도 있다)
홀 반대쪽으로 철도 플랫폼이 보인다. 플랫폼이 건물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걸 보니 여기가 JR큐슈선 종점이라서 그런가 보다.
플랫폼은 슬레이트 지붕에 기둥과 천정도 목재를 사용하여 옛정취가 물씬 풍기고, 개찰구 너머로 보이는 화단과 꽃, 조형물들이 정결하게 예쁘다.
모지코역 옆 버스정류장 옆에도 기차레일이 전시되어 있다.
시내 길로 나와 모지, 고쿠라쪽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따라 300M쯤 가면 큐슈철도기념관이 나온다.
가는 길에서 큐슈철도기념관 입간판이 보이고, 빨간색기차, 증기기관차가 보인다.
일전에 철도 선배 한분이 큐슈철도기념관을 방문하고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는데 엄청 부러웠는데 오늘 오게 된 것이다.
이곳에 큐슈철도기념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항만물류와 철도가 발달된 곳이라는 이야기다.
입구에 예쁜 전동차 앞부분을 잘라 전시한 몇 대의 기차 안에 어린이들이 구경하며 놀고 있고, 기념관 매표소 앞엔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퇴역했으나 1970년대에도 큰 역에서는 증기기관차를 볼 수 있었다.
큐슈철도기념관 안에는 관람객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있다.
매표소에 가서 입장권을 끊으려니까 4:30분 까지만 입관이 가능하고 지금은 입관이 안 된다고 한다.
지금이 4:40분이고 아직 관람객들이 많이 있는데 입장시켜 달라니까 규정이 그러니 절대 안된단다.
일본인들 참 깐깐하다. 깐깐하다고 했지만 어떻게 보면 원칙을 지키는 것이고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일본사람들을 흔히 ‘회사인간’이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자신이나 가정보다도 직장을 우선하는 일본인들의 자세를 이야기 한 것일 게다.
홋가이도 시골 호로마이역, 퇴직을 앞둔 역장 오토마츠는 아내 시즈에와 결혼하고 17년 만에 아이를 가진다.
예쁜 딸 유키코(눈의 아이)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태어 난지 두 달 만에 유키코가 열병이 나서 병원에 가게 되지만 오토는 역을 지키고 아내가 유키고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간 유키코는 이후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아내가 지병으로 도시의 병원에 입원하는 날도 오토는 역을 지켜야했고 얼마 후 아내도 쓸쓸히 떠났다.
오토는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던 중 딸의 혼령을 만나 미안하다고 전하고, 다음날 눈 덮인 역에 쓰러져 죽는다.
눈 쌓인 시골역 플랫폼에 서서 떠나가는 열차 뒤를 바라보며 “신고요시(신호양호), 후부요시(후면 이상없음)” 를 외치는오토마츠의 그 목소리가 지금도 환청처럼 들린다.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면 역사적 감정을 꺼내거나 친일 운운하는 사람도 있다.
전여옥이 쓴 '일본은 없다'에 보면 일본인들은 개성도 없고, 남녀차별이 심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배알도 없는 한심한 나라, 특히 종군위안부등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것 대해서는 비상식.비인간.비도덕.비역사성을 가진 수치를 모르는 일본인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그리고 선진국, 경제대국이라는 화려한 인식과는 달리, 국민들은 절약하고 줄여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삶의 질이 낮은 나라 라고 하며 매몰차게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힘있는 나라이니 만큼, 과거사만 반성하라고 외칠것이 아니라 우리스스로 내실을 가하고 극일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한일간의 침략 역사는 100년 전의 이야기고, 전여옥이 쓴 글은 30년 전의 이야기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전 세계가 물리적 국경이 없는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고 한국은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과거의 역사를 잊어서도 안되지만, 과거사에 매몰되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시대의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
이제 세계도 일본도 한국을 부러워하는 시대가 된 만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일간의 경제협력과 공동안보를 통하여 국가의 발전과 안녕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 맞다.
내가 꼰대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난 일본을 칭찬하고 싶을때가 많다.
고객들에게 친절하고, 쓰레기하나 버리지 않고,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정신,직장인의 자세같은 것이다.
어쨌든, 그런 일본 직장인들의 자세를 알기에, 무리해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시된 증기기관차에 올라 사진을 찍어둔다.
모지코역 전체를 보기 위해 위쪽으로 올라간다.
위쪽에도 주차장이 있고, 높은 곳이다 보니 모지코역, 철도박물관에 전시된 차량들, 모지코항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 후문 매표소가 있어 혹시나 싶어 입관시켜 달랬더니 역시나 안된다고 한다. 역시 일본인은 다르다.
그게 맞다 그래야 한다
나부터 원칙을 지켜야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벌써 5시가 넘었고, 이제 다시 모지코레트로로 내려가 유람선선착장에 있는 쇼핑센터에 있어 먼저 들러보기로 한다.
땀도 식히고 뭔가 먹을 만한 것이 있나 쇼핑센터에 올라가니 특별히 살 것도 먹을 것도 없다.
아직 날씨는 덥고 여행은 지친다.
여행할 때는 1일 5식을 먹어야 된다. 아침-간식-점심-간식-저녁,
배는 부르지만 간식 들어갈 배는 있고, 그 지역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 먹는 것이 남는 것이고 여행의 즐거움이다.
벌써 5시 10분 저녁을 생각하니 정찬을 먹기는 그렇고, 인근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간다.
테이블 5개 정도 작은 가게인데 3테이블에 손님이 있다.
이곳에도 중국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시원한 망고 주스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밑에는 망고주스가 들어있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과 크림, 체리 하나 올려 진 주스인데... 달고 시원하고 행복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 반.
모지코에 올 때만 해도 시간이 많고 힘도 남아 걸어왔는데, 시모노세키로 돌아갈때는 새로운 경험도 할 겸 유람선을 타고 가기로 했다.
한 시간에 3편이 운행되는데 5분이면 도착한다. 올 땐 반나절을 걸어왔는데 ...ㅎㅎ
30명 정도의 승객이 탑승하고 출발한다. 배위 옥상이 전망이 좋은지 절반정도는 위로 올라가고 나는 다리도 아프고 선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기를 쓰기위해 사진과 동영상 촬영은 필수, 위치가 바뀔 때 마다 풍경이 다르고 멋져 또 여러 장의 사진을 찍게 된다.
올 6월 미국 서부여행을 할 때 사진을 너무 찍는다고 아들 딸,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는데 여행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그래도 사진이 최고고, 사진을 보면 그때 느낀 감동들이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
잠시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시모노세키 카라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시모노세키역에 내린다.
먼저 숙소로 가서 샤워를 하고 다시 저녁을 먹으러 아침에 답사해 두었던 오카모토로 갈 예정이다.
호텔 프론트에서 가방을 찾아 방으로 더위로 달구어진 실내가 후덥지근하다.
에어콘을 최대한 높여도 고장이 났는지 영 시원하지가 않다.
샤워 후 개운한 마음으로 나오며 프론트에 에어콘이 시원하지 않다니까 필요하면 선풍기를 주겠다고 한다.
종일 걸어 피곤해서 쉬고 싶지만 여행지의 저녁 문화를 즐기는 것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고 추억이다.
시모노세키 역을 거쳐, 부산문을 내려가 ‘오카모토 선어집’을 향해간다.
유튜브에서도 봤던 ‘부산식당’도 보인다. 드럼통 테이블과 김치찌개, 전 김치사진이 붙어 있는걸 보니 선술집인 것도 같다.
이어서 이자카야, 야키토리, 사카나시장 ...
벌써 어두워졌고, 술집과 식당들에선 저녁 분위기가 난다.
사진이나 유튜브에서 봤던 걸 실제로 보니 또 새롭다.
‘오카모토’에 도착했다.
밖에도 손님들이 사람들이 서 있는 걸 보니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
‘뭐지? ....’
줄 옆으로 들어가 내부를 들여다보니 아침에 문 닫았을 때 본 것처럼 작은 가게가 아니고 안쪽으로 긴 제법 큰 가게다.
입구에는 활어, 선어회, 복어, 문어 ... 수족관과 냉장고 안엔 각종생선들이 가득하고, 테이블 마다 손님들로 꽉 찼다.
사전에 예약하고 가는 것이 좋다고는 들었지만 혼자가면서 예약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하나? 여기 해산물 코스가 맛있다고 했는데...’
대기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 걸 보니 일단 자리가 날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 같고,
테이블 마다 3-4명이 앉아 있는데 바쁜 영업시간에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다.
한국 같으면 당연히 ‘혼자는 안 됩니다’ 하겠지만, 일본은 혼자 식사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괜찮을 것도 같기도 하지만 괜히 폐를 끼칠 것 같은 마음에 선뜻 줄서기가 내키지 않는다.
몇 번을 멈칫 멈칫 하다가 사진만 찍어두고는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한다.
술집골목이라 해도 가게가 그리 많지는 않고, 주로 고기를 굽는 야키니쿠(숯불구이)나 야키토리(닭고기) 집이 많다.
막상 나오니 ‘오늘은 이걸 먹어봐야지’ 하고 땡기는 음식이 없다.
특히 혼자 여행하면 제일 불편한 것이 혼자 술집에 들어가 고기를 굽거나 술을 먹는 것이다.
지난번에 쿠루메에서 야키니쿠에 나마비루(생맥주)를 석 잔이나 비웠지만 그때도 같이 대화할 사람도 없어 혼자 고기를 구워가며 홀짝 홀짝 마셨는데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마사지 숍도 들러 피로나 풀고 갈까 하다가 혼자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것도 부담스럽다.
씨몰과 다이미루 식당가에도 맛집도 있고, 도시락도 많은데 아뿔사 거기도 이미 문들 닫았다.
숙소에서 씻고 좀 쉬다 나왔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다 시간이 많이 늦어버린 모양이다.
그래 ‘찬란한 석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튜버가 저녁엔 편의점에 도시락이나 초밥을 싸게 팔고 숙소에서 소주한잔 하면 느긋하게 먹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렇게 해보기로 한다.
낯선 도시에서의 호기심과 기대, 방황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아침에 봐 두었던 유메마트에 들러 도시락과 빵, 캔맥주 등을 사서 호텔로 간다.
하지만 외국에 여행와서 이곳의 밤문화도 보고 술한잔 못하면 너무 아쉬울것 같다.
그래 호텔 맞은편 꼬치집에서 한잔 하자’
호텔 근처는 역 뒷쪽 한적한 곳이라 술집도 딱 하나 뿐이라 아마 자리도 있을테고, 혼자 먹어도 그리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아직 영업 중이다.
‘자리 있느냐?’고 물으니 ‘만석’이라며 미안하다고 한다.
‘이런 ...’ 다시 시내로 나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숙소로 들어와 도시락에 맥주한잔 하며 시모노세키의 첫날 밤을 마감한다.
낮에 후덥지근하던 에어콘이 이제는 시원해서 딱 좋고, 피곤함이 오히려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건강해서, 시간이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이렇게 여행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일은 고쿠라로 떠난다.
(5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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