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여름 장맛비가 열흘 넘게 내리고 있다.
우중충하고 끈적한 날씨의 연속이건만 그렇게 비가 밉지는 않다.
잠시 일을 멈추고 커피한잔을 빼들고 창가로 나간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얼룩진 풍경들, 나도 촛점잃은 눈으로 창 너머의 세상을 바라다본다
우산을 쓰고도 바삐 움직이는 군상들
라이트를 켜고 와이퍼를 바삐 돌리는 차들과 작은 틈새라도 보이면 얼른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염치없는 분(?)도 보인다.
그런 와중에도 비는 자기가 내릴 곳에 그저 내릴 뿐이다
잠시 세상 살아가는 철학을 떠올려 본다.
형이상학이 어떻고, 철학적 사유가 어떻고는 너무 어려운 것 같고
그냥 세상 살아가면서 숨통 막힐 듯이 갑갑하게 불안하게 살지 않고
이왕이면 즐겁고 가치있고 의미있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단식을 마치셨다는 선배님께 문안인사를 드려야겠는데 다가가기가 쉽지 않아 홈피에 건강회복하시면 식사 초대하겠다는 글만 올렸는데 어제 오후 저녁 같이하자는 전화가 왔다.
사실 저녁에 손님 만나기로 했지만 풀리지 않는 고민 때문에 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아 취소를 했는데, 선배님이 오신다는 말에 금방 생기가 돈 것이다
“예, 좋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단식을 마친 선배님은 다소 야위어 보였으나 아주 강건해 보이셨다
지난 5월 중국 여행 시 뵈었던 84세의 설봉선생님의 눈빛이 젊은이 보다 더 매섭고 빛이 났었는데 난 오늘 선배님의 눈빛에서 그 설봉선생님의 그 눈빛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단식의 결과인지 선배님은 영혼과 육체가 맑아 보이셨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느꼈지만 열흘간의 단식, 엄청난 독서량, 자신만의 건강관리, 여가를 즐길 줄 아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과의 폭넓고 깊은 인간관계 유지, 한국 및 중국에서의 사회봉사 및 구제활동, 그리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배님의 근저에는 과연 ‘세상 살아가는 철학과 여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어쩌면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살아가면서도 즐겁고 보람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은 선배님 나름의 '세상 살아가는 철학'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난 세상 살아가는 철학이 없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이 되는지?
아내와 자식에 대한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무엇이며, 가정의 행복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돈은 왜 벌어야 하며 어느 정도가 적당하며 어떻게 써야 보람되고 가치 있는지 ...
그저 남에게 피해 안주고 열심히 살아가고, 직장에서도 몸 아끼지 않고 미친놈처럼 열심히 하면 인생 잘 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숨 쉴 여유도 없이 허우적거리며 달음박질치듯 살아가는데도 난 왜 그리 쫓기고 부족하고 내면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이 없는 걸까?
그것은 결국 나에게 세상 살아가는 철학이 없다는 것이었다. 철학의 빈곤이 만족함을 모르게하고, 대충대충 하지 못하는 완벽주의가 스스로 삶을 고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행복이 어디 별도로 준비되어 있어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과 만족이 어떤 행위의 결과로, 채움의 풍요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데...
장맛비가 그냥 그 자리에 내리고 있듯이
행복도, 기쁨도, 보람도, 만족도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다만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육신과 영혼’, ‘도덕과 욕구’, ‘종교와 현실’
어느 철학자가 ‘삶이란 하나의 시체를 끌고 가는 영혼의 발자취일 뿐’ 이라고 한 것처럼, 육체적 가치는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 것이므로 그 시체를 끌고 가는 영혼만이 최고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것일까?
누구에게나 있는 영혼과 육신,
모든 사람은 영혼을 육신에 못으로 박아 두어서 영혼은 항상 육신은 함께 있는 것인데
육신은 “쉬고 싶다, 즐기고 싶다”고 하니 영혼이 부정하고, 영혼이 원하는 쪽으로 가려니 내 육신이 힘들어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여인의 가슴을 두고 육신은 잠시 쾌락하였으나 영혼은 범죄자가 되어 고통하며 차라리 두 눈 없이 천국에 가길 바란다고 내면에서 싸우고 있으니, 어찌 몸과 마음이 편하리요.
결국 나란 놈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내 몸이 원하는 대로 할수 없는 영혼의 노예인가?
가려니 묶여있고, 풀어도 가지 못하는 ‘도덕의 덫에 갇힌 현실주의자’인가?
모르겠다.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육체적 욕망을 자기부정과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도덕심이란 이름으로 제압하고 다시는 못 나오도록 뚜껑을 꼭 닫아두는 것이 최고의 선을 이루는 것인지.........영혼만큼 육신도 가치 있는 것이니 육신의 즐거움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추구해야 옳은지 ...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했는데 영혼을 지고 다니느라 수고한 육신에게 어느정도 보상도 주어야 되는게 맞지 않을까? 육신이 지쳐 이제 나 못해먹겠다고 파업하거나 죽어버리면 너 영혼도 머무를 곳이 없는것 아닌가?)
어쨌든 이런 육신과 영혼이 다투지 않도록 잘 다스려 스스로 행복과 기쁨을 찾는 방법이 이 세상 살아가는 철학이고 지혜가 아닐까?
물 흐르듯이 조용히 천천히 살면서도 행복과 기쁨을 찾는 삶이 있는 반면, 그것들을 찾아 밤낮으로 허우적거리며 뛰어다니지만 얻지 못하는 삶의 차이가 바로, 세상 살아가는 철학의 유무 차이가 아닐까 싶다.
“긍정적인 삶, 느림의 미학, 범사에 감사하라”를 생각하며
제목을 ‘철학이 없는 삶은 빈곤하다’라고 하려다가 ‘철학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라고 바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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