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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건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2. 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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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역설적인 말이다 
‘싼 게 비지떡이다’ 이것도 마찬가지 
어느 쪽도 잘 생각하면 목적을 얻어내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급한 나머지 작은 길을 지름길이라고 여기고 가다보면 막히거나 헤매게 되고, 거리는 조금 멀지만 큰 길을 가는 편이 오히려 빠를수도 있다. 
싼 물건은 얼마 안되어 못쓰게 되고 다시 사야 하니 결국은 비싸게 친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이러한 속담이 모두 진실이라 것을 알게 된다. 

5년 전, 싸지만 편한 구두를 샀다. 직장인이고 나이도 있어 늘 검은 계통의 양복과 단화만 신는데, 굽이 딱딱한 단화는 걸을 때 마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서 신경이 많이 쓰인다. 특히 지하도를 걸을 때는 그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울려서 소리를 줄이려 발 앞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 보행을 해 보지만 힘도 들고 까치발 같아 잘되지 않는다. 반면 굽이 딱딱한 정장화를 신으면 자연스럽게 어깨가 펴지고 천천히 품위 있게 걷게 된다. 참 희한하다.  

나는 걸음걸이가 이상한지 구두 뒤축 바깥 면이 금방 닳아 없어진다. 몸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굽이 닳으면 초승달 같은 징을 추가로 박아 모양을 바로잡지만 모양이 서지 않는다. 

어느 날 광고를 보고 찾아가 정장형 캐주얼 신발을 샀다. 디자인도 괜찮지만 구두 밑창과 굽을 봤을 때 속이 후련해졌다. 옛날부터 쭉 찾고 있던 물건을 만난 그런 느낌이었다.
캐주얼인데도 리갈화를 닮았고 엄청 가볍다. 무엇보다 값이 싸고 굽이 우레탄?이라 굽 소리도 나지 않고 닳지도 않는다. 
 
나에겐 신발의 신세계다. 좋은 물건은 소유자를 움직이게 한다. 
뚜벅뚜벅(또각또각) 무게 있게 걷다가 사뿐사뿐 가볍게 밟히는 기분이 좋고 이젠 구두를 신고 달린다. 신발 하나가 기분을 바꾸고, 무게를 낮추고, 원칙을 깨고 새로움을 받아들이게 한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더니  ‘좋은 물건’엔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옷이든 구두든 그런 물건은 꼭 비싼 것이 아니라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몸에 걸치면 내 자신과 한 몸인 듯 편안하다. 5년 전의 그 구두는 지금도 그럭저럭 사용할 수는 있지만 새것을 사려니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단다. 

아들 결혼식에 신을 구두는 리갈화로 다시 맞췄다. 
또각또각 무게 있게 걸을 땐 이 신을 신고, 사뿐사뿐 가볍게 걸을 땐 5년 전 그 신발을 신는다. 

큰길을 가는게 빠르겠지만, 급할 땐 샛길로 갈 수 도 있다.   
싸다고 꼭 비지 떡 만은 아니다. 
좋은 물건은 내가 편안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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