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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없는 계획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2. 2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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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새해를 맞으면 늘 다이어리 첫 장에 한해를 살아갈 거룩한 맹세와 각오를 적어 둔다. 
지난 연말엔 바쁘기도 해서 새해가 좀 더 천천히 왔으면 했는데, 강물에 떠밀리듯이 오는 시간에 떠밀려 결국 아무런 맹세도 각오도 준비하지 못한 채 덜렁 새해를 맞고 말았다

그렇게 2024년이 시작된지도 벌써 50여일이 지난 2월 하순이고, 별 일 없이 오늘이 이어진다.  다행이다. 
계획하지 않는 인생이 준비 없는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중년마저도 넘길 즈음의 나이엔 아무 계획 없는 계획이 어쩌면 가장 좋은 계획인지도 모를 일이다. 

봄엔 씨를 뿌리고, 여름엔 열매를 맺고, 가을엔 익어 추수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가을이 깊었는데도 아직도 여름인줄 알고 열매를 달고 속살만 채우다 갑자기 서리라도 내리게 되면 쭉정이가 되고 희나리가 되고 만다. 

한때는 뒤늦은 공부하느라 오랫동안 ‘무한도전’의 시기를 보냈다. 낮엔 입에 단내(탄내) 나도록 죽을 똥 살똥 일하고, 밤엔 배움의 허기를 채우고 관계를 넓혀가느라 밤낮도, 나이도, 건강도 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갔었다.  
공부에 대한 한(恨)?..... 뭔가를 만들어 내고 싶었고, 만들어도 냈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한편 잃은 것도 많다. TV 한번 제대로 못보고, 가정에 소홀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여행등도 모두 차후로 미루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성장해가는 내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내가 꿈꾸는 것에 다가가지 못하는 목표에의 구속당한 시간이었다. 
째깍 째깍 시간 갉아먹는 소리에 늘 불안해 해고, 엄청난 스트레스로 몸마저 상하다 보니 ‘이건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 시간도 흐르고 이젠 어느 정도 목표에도 다가갔다. 그런데 '자기 팔자 개 못 준다'고 내가 은퇴를 한다면 일본에 유학 가서 문학이나 어학공부를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성격에 올해 또 무엇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ㅎㅎ  

어쨌든 올핸 아무 계획도 없다. 계획을 못 세운 게 아니라 사실은 안 세운 것이다. 
가을엔 새로운 열매를 맺고 속살을 채워나갈 것이 아니라, 한여름 채운 속살들을 맑은 햇살, 파란 바람에 단단히 익혀서 수확할 때다. 들판의 곡식이 성장을 멈추고 맑은 햇살아래 익어가듯이 우리 삶도 그래야 한다.

연잎도 빗물을 받치고 있다가 힘이 들면 쏟아버리는데 더 이상 목표란 미명아래 스스로를 구속하고 싶지 않다. 무엇을 계획하고 실행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것 보다,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재미나게 살자는 (단순한) 계획이, 다시 촛불을 켜고 비장한 각오로 세운 거창한 계획보다 오히려 지금의 나이에 맞는 현명한 계획이 아닐까? 

계획은 없더라도, 이제부턴 하고 싶은 일을 하자
가고 싶으면 아무곳에나 떠나자. 역마살이든 방랑벽이라도 좋다 ... 내가 좋으면 가는거다.
비싼 음식은 아니라도 소고기국밥 맛있는 집이라든지, 열무국수를 파는곳이 있으면 꼭 들르리라
경매물건을 검색한 후, 바닷가, 강가, 계곡, 전망좋은 언덕위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 꿈을 그려보며 행복해하자. 자연인이 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좋으면 하는거다.  

지식의 양을 채우는 것을 포기하니 머리도 덜 복잡하다. 
뭘 해야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물질에도 욕심내지 않으니 마음도 가볍다.
블로그를 억지로 채우기위해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지도 말자 .. 폼잡을 일도 돈벌 것도 아니다.

계획없이 마음가는대로 쉬엄쉬엄 하자
무위이무불위 (無爲而無不爲), 아무것도 하는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올해는 그렇게 살란다

gentle함과 여유, 소년같은 웃음, 화장기 없는 담백함. 
이젠 삶의 고상한 향기가 나는 멋진 중년으로 나이 들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단 말도 해야겠다. 

“재 너머 성궐롱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권롱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나의 소중한 친구들에게 올핸 내 시간을 많이 나눠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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