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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지도 못하고, 채우지도 못하고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3. 12. 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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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울을 다녀왔다. 

지 혼자 세상일 다 하는 것처럼 죽을 똥 살똥 새가 나도록 설치드만
결국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말도 꼬이고 판단력도 흐려지는 것 같아
여기서 쉬어주지 않으면 미칠 수 있다는 생각에 까지 이른다.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라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그쳐주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 자투리 시간이라도 생길 량이면,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달랑 낚아채 가버리다 보니 결국 바쁨 중에 여유를 찾을 수밖에 없어 이번 출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사실 고속버스는 우리 회사차라 공짜지만, 그동안 시간이 아까워 항공편이나 KTX를 이용했었는데, 나도 변해보자 하면서 선택한 것이 겨우 이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가방을 들고 갈까?, 가방을 들면 짐인데 책만 하나 들고 갈까?
두꺼운 책은 행동하기 불편하니 포켓에 들어가는 작은 책을 가지고 갈까?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 사소한 것 때문에 또 마음의 갈등을 하다, “이 사람아 마음을 비운다면서 무슨 책이냐?” “말로만 쉼이니 뭐니 하지 말고, 마음도 비우고 손도 비우고 그냥 빈 몸으로 떠나시게”
지 혼자 충고하고, 지 혼자 깨닫고 육갑을 떨다가 ...
호주머니에 손 푹 찔러 넣고 떠나는 빈손이 이렇게 가벼울 줄이야...

갑자기 다가온 한파에 바깥 날씨는 추웠지만, 고속버스 차장을 밀고 들어오는 햇살에 아저씨 볼이 발그레 따사롭다. 

많은 풍경들이, 세상들이 지나간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꽃 전구 같기도 하고, 문득 밤하늘 은하수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던 
조롱조롱 매달렸던 청도의 빨간 감들도 까치밥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나목이 되어 서있다. 

높고 낮은 산들을 울긋 불긋 물들였을 떡갈, 상수리, 굴참나무
예전엔 신작로였을 폐도 산길에 몇 남은 포플러마저 옷을 벗고 나니 이제 푸른색이라곤 대한민국 정신인 저 소나무뿐이다.

벌판엔 하얀 비닐로 싸둔 생 볏짚 원형 곤포사일리지만 휑하니 나뒹굴고
북쪽 산을 급하게 미끄러져 내린 겨울바람은, 잔가지 많은 메타세콰이어의 늘씬한 실루엣을 스치며 쉬~잉~ 바람소리를 일으키는 것 같다.

어느새 겨울의 한가운데다. 
황량한 가슴에서 바라보니 스치는 풍경들도 황량하다. 

생각을 비우려고 눈을 감았다가, 차라리 풍경이나 담으려고 또 눈을 뜨는 것을 반복한다.
비우기로 해 놓고 거기 다시 빈 것으로 채우려고 하니 
결국 비우지도 못하고, 채우지도 못하고 ....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쉼도 없는 모양이다.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
초점 잃은 시야처럼 멍하니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새해 달력 나왔다고 헌 달력 미련없이 떼어버리는 걸 보니 .. 올 해도 다 가는가 보다. 

"https://www.youtube.com/embed/3wN7LnOaG2w" title="회상 - 임지훈(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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