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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나날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3. 12. 1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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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낮에 어둑한 하늘을 보는 게 참 오래간 만이다
산불도 덮어야겠지만, 감성을 되찾을 기회도 없어서인지 이 어둑한 하늘을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것 같다.

아파트 바깥 창에 비의 얼룩이 지고 베란다 난간 아래 송글 송글 빗방울이 맺혔다가 이따금씩 떨어지는걸 보니 큰 비는 아니지만 밖엔 비가 오는 모양이다
비오는 밖이 보이도록 커튼을 열어젖히고 책상 모서리에 붙은 침대에 모로 앉아 책을 읽는다.

며칠 전 친구가 추천한 '카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이다. 

귀족 저택의 집사로 살면서, 주인과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집사의 행동방식과 사고가 영화 '철도원'의 오토마츠 같기도 하고, 한편 '나'를 보는 것도 같다.
그런 나를 변화시킬 해답을 이 책에서 찾으려 했던 것인지...  
그래서 그의 '남아있는 나날'에 어떤 삶의 변화와 전개가 일어날지가 못내 궁금해진다.  
(오늘 중으로 그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35년간 귀족 저택의 집사로 살아오면서 집사로서의 ‘정신’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주인공, 그는 위대한 집사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인간으로서 품위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런데 소설이 끝나지만 기대했던 주인공의 남아있는 나날에 대한 삶의 변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이기에 가슴속의 사랑하는 감정, 인간으로서의 고뇌 같은 것도 있었지만, 위대한 집사이기에 자신의 생각을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오로지 긍지를 가지고 직무에, 품위를 위해 충실했던 주인공을 통해.... '남아있는 나날'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렸다. 

"이제 당신도 예전만큼 일을 해 낼 수 없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 이젠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뒤는 그만 돌아보고 좀 더 적극적인 시선으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는 선창가에서 만난, 같은 집사출신 퇴직자가 한 충고들에 또 밑줄을 그어본다.

우리도 늙어간다. 지금까지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어느 정도 한계도 느낄 나이다. 나 역시 주인공 집사처럼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바치고 희생했기에(진짜 영혼까지도) 이제 남은 것도 별로 없다. 그게 나였다. 
그런 나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것이 결코 잘못되지도 않았고, 후회할 일도 아니다. 

자기 삶이 없더라도, 최고라는 호칭을 받기 위해 헌신하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다. 
다만, 나의 삶이 산 게 아니라는 생각, 남의 삶을 대신 잘 살아줬다는 생각
그래서 지금부터는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후회하고 방황할지라도 자신만의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길이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가장자리'는 삶을 옥죄이는 헛것들의 무게가 빠져나가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자유의 자리'다.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욕심.욕망으로 부터 자유 하는 것, ‘단사리(斷捨離)’ 끊고, 버리고, 멀리하는 것

나도 이제 나이만큼의 '품위'를 가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품위'는 여성의 아름다움과도 같아서 분석하려는 것도 무의미하고, 갖춰보려고 하는 것도 억지로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헛된 짓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위대한 집사로서의 품위가 아니라, 나 자신의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품위’

착고를 끊으니 날개가 달린다. 
우리에게 지금은, 선창에 전등불이 켜지고 멋진 축제가 기다리는 멋진 저녁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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