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친구들과의 금정산 산행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사전 답사에 나섰다.
남들은 명산이라고 전국에서 오는데, 나는 집 뒷산이 금정산임에도 불구하고 두어 번 올랐던 게 전부다.
그런 내가 안하던 등산을 하고자 한 것은, 보다 생산적인 활동을 하자고 제안한 내 책임 때문이다.
48년 지기 우리 친구들은 주말에 틈만 나면 스크린 골프를 친다.
좋은 친구들끼리 이렇게 노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공기도 안 좋은 좁은 방안에 갇혀 스크린골프나 하는 것은 생산적이지도,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등산을 제안한 것이고, 내일이 그 첫 번째 실행에 옮기는 날이다.
그런데 모두 등산 경험이 적다 보니 부득이 등산을 제안한 내가 계획을 세워야 했고, 최소한 어디 주차하고, 어디서 올라가고, 어디서 밥 먹어야 할 지를 대충이라도 알아두기 위한 답사였다.
말은 답사지만, 사실은 집에서 갑갑해 할 아내에게 드라이브 겸 단풍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다.
남자들이야 회사다, 사회활동이다, 경조사 참석, 하물며 핑계까지 대며 밖으로 나가지만, 아내들은 집안 살림을 살다보면 아무래도 그럴 기회가 적다.
그래서 가끔씩은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도 하고, 맛집도 데려가 주는 것이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도 좋다.
물론 나도 아내의 모임에 간섭하지 않고, 친구부부끼리 모여 식사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지만 그건 그거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도 있을텐데 그걸 미리 알아서 챙겨주는 것이 남편의 역할이고 지혜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이왕이면 계절이 바뀐다든지, 축제가 있다든지, 혹은 아내가 지쳐있다 싶을 때 챙겨주면 효과만점이다.
“지금이 가을의 절정 같은데 단풍구경이나 갑시다”
“어디로 갈 건데요?”
“당신 가고 싶은 데 아무데나....”
“핸들 잡은 사람 마음이니까 알아서 갑시다.”
이런 말이 나오면 내심 싫지 않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근교의 석남사, 통도사, 배내골, 표충사의 가을단풍도 좋지만, 금정산 단풍도 일품이라 이왕이면 내일 산행 사전답사도 할 겸 금정산으로 핸들을 돌렸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초입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은 벌써 절반 이상 떨어졌고, 맑은 단풍의 상징인 벚나무는 벌써 나목이 되어있다.
지금도 차창으로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고 떨어진 낙엽들은 길 양쪽에 자북이 쌓였다.
늦가을 ... 찬 바람도 불지 않는데 스산함이 느껴진다.
차를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 마지막 가을 풍경을 담으려는데 언제 왔는지 뒷차가 걸음을 재촉한다.
위쪽으로 올라가니 햇볕이 더 들고, 칙칙한 아래쪽보다 단풍들도 더 맑고 곱다.
무심정, 국청사를 지나 내일 등산을 시작할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 길에도 가을은 깊어있다.
내일 이 근처에 차를 대고 올라가면 되겠다.
나는 이런 드라이브 하는 시간들이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자유. 어디든지 가도 되는 목적 없음.
가다가 옥수수 빵이라도 팔면 더 좋다.
금정산 청소년 수련원, 산성마을 먹거리 촌, 남문 산성고개 ... 이 길, 저 길을 배회하고 다시 내려오는 길 아래쪽으로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듬뿍 눈에 들어온다.
화명수목원이다. 그래 여기도 들르자.
평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에 여유가 많다.
수목원 입구 대천교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들이 장관이다.
정면으론 수목원이 있고, 계곡 위쪽으로는 돌로 만든 아치교, 계곡 아래론 대천 계곡이 이어진다.
아치교 좌우에 석축을 쌓고, 바닥은 콘크리트에 자연석을 곁들여 꾸민 것이 인공적이긴 하지만, 자잘한 맑은 물줄기와 양쪽의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도시적 대칭미가 돋보인다. 아래쪽으론 자연계곡 그대로 보존되어 인공미와 자연미의 조화가 절묘하다.
전시온실과 중앙광장을 지나면 수목원 오솔길로 이어진다.
화목원, 초화원, 활엽수원, 침엽수원 ... 나무의 키와 꽃과 단풍을 고려한 계획적인 조경이라 이곳은 사철 아름답고, 특히 가을 단풍은 맑고 곱고 투명하다.
벚꽃 피던 봄, 도랑을 흐르는 물에 벚꽃 잎이 하얗게 떠내려 오고, 다시 웅덩이에 모여선 물살을 따라 맴을 그렸는데, 오늘은 발아래 황토 빛 낙엽을 가득 쌓아 두었고, 애기동백은 분홍색 꽃잎 양탄자 깔아 놓았다.
아내가 방금 떨어진 떨어진 고운 낙엽 하나 주워 가을 냄새를 맡는다.
표정이 소녀같은 걸 보니 아내도 가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만 가을을 좋아하는 줄 알았고, 나만 가을 감성을 채우려 했다)
단풍이야기, 자식이야기, 노후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만하면 됐다’는 안도감과 행복함에 젖는다.
거기에는 ‘물질에, 명예에 절대 욕심을 부리지 마라, 뭘 자꾸 하려고 하지마라, 그냥 건강하게 살면된다’는 아내의 말에 쇠뇌당한 탓도 있겠지만, 아들, 딸 모두 결혼해서 소박하지만 건강한 정신으로 잘 살고 있으니 자식 걱정없는 것도 한 요인이 됐을게다.
발길 닿는 곳곳, 고운 단풍들을 만날 때 마다 감탄이 이어지고, 나중을 위해 열심히 카메라에도 담아둔다.
중앙광장 옆 키 큰 메타세콰이어들은 붉은 옷을 입고 서 있다.
문득 ‘붉은 수수밭’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메타세과이어는 플라타너스와 함께 내가 참 좋아하는 나무다.
한 그루 한 그루 쭉쭉 뻗은 외모가 시원하고, 봄.여름.가을.겨울 다 멋있다.
쭉쭉 뻗은 메타세콰이어 길을 걸으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도 들지만, 무엇보다 한겨울 서리가 앉은 강가의 메타세콰이어의 실루엣은 환상을 보는 듯 아득하다.
내일 산성마을을 통해 북문으로 올라가는 것 보다, 화명수목원에서 학생수련원을 통해서 올라가면 더 좋을 것 같다.
“뭐 먹을까?”
“양산에 곰탕집이 진국이던데 곰탕 한 그릇 합시다”
꼭 비싼 것, 새로운 것을 먹지 않아도 좋다.
그냥 밖에 나와 먹으면 그게 바로 외식이다.
우연히 발견해 단골이 된 곰탕집. 진한 곰탕 한 그릇 먹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3인분 포장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이번 주 금요일 아내가 친구들이랑 베트남 여행을 가는데, 나 혼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먹는 것에 목숨 걸지 않는다.
곰국을 렌지에 데우고, 거기 밥 두 숟갈, 김치 몇 조각 같이 넣어서 후루룩 마셔버리면 식사 끝이다.
늘 그래왔고, 이렇게 하면 혼자 있어도 5일 정도는 밥 걱정이 없다.
아내는 착하다. 하얀 백지처럼 순수하고 합리적이라 (주체성이 유달리 강한) 아이들도 엄마 말은 듣는다.
반면, 잘못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늘 나다.
그래서 그런지 35년 넘게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화내거나 다툰 적이 없다.
(이런 내용들을 담아 아내 회갑 때 장문의 손편지를 써서 자식들 있는 앞에서 읽어주었다)
세상도 바쁘고 나도 늘 바쁘다.
그럼에도 난 오늘, ‘실속 없는 바쁨’보다 ‘실속 있는 여유’와 '아내를 위함'을 택했다.
덕분에 집 안엔 평안과 작은 행복들로 채워졌다.
화려했지만 살아갈수록 단점이 더 보이는 사람보다, 수수하지만 살아갈수록 장점이 보이는 사람이 좋다.
가만히 고생한 아내의 손을 잡아본다.
오래묵어 곰삭은 정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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