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가 보다
바쁜 일상 속에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
파란 하늘위에 점점이 떠가는 흰 구름
내 마음은 동화 속 신천지를 찾는 탐험가처럼
고요한 먼 바다를 항해하고 있고,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깊은 우물을 회돌이 쳐 울리는 맑음 음색의 공명처럼,
그 푸름의 깊이에 한없이 빨려든다
이런 하늘을 청자 빛 하늘이라 했던가?
에메랄드빛이 더 어울릴까?
이희승은 벽공(碧空,푸른하늘)에 일러
‘손톱으로 툭 튕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이라 했는데
나의 짧은 형용사로 이를 표현할 길 없어
차라리 내가 물들고 만다
가을이 저 혼자 온다.
난 아직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가을은 이런 나에 아랑곳 없이 때가 되었다고 와 버렸다.
얼마 후 또 앞질러 갈 때면
그 뒤를 또 안타까워하며 좇아가야 할 텐데
이런 가을이 오는데 나는 왜 설레는가.
지금은 가을의 초입
저만치 풍요로움도, 가을에 비친 내 그림자 같은 쓸쓸함도 같이 왔다.
그래 .. 가을은 좀 쓸쓸해야 제 맛이지
워즈워드의 가을이나 릴케의 가을은 내게 사치스러운 것.
그저 시골마을에 감 하나 익어가고
산길 풀 섶에 억새 하나 하얗게 피어주면 된다.
빛깔고운 단풍보다
발바닥 가득 밟혀 바스락거리는 마른 낙엽이 더 좋고
탐스럽게 익은 홍로사과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산속에
저 혼자 익어터지는 꿀밤이 더 좋다.
가득 찬 것 보다, 화려한 것 보다
삶에 지치고, 상처받고, 벌레 먹은 그대로 일지라도
난 화장기 없는 담백한 삶의 모습들이 좋다.
가을이면
방금 소리 없는 선회로 내려앉은 낙엽위에
발송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큰 잎을 떨구던 초등학교 그네 옆 플라타너스가 아직도 추억되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촌놈인가 보다.
황토 빛 낙엽을 태우노라면
난 진한 커피 향을 떠 올린다
아니? 맨발로 밟아보는 흙냄새?
가을의 나이에 가을을 맞이하며 느끼는 것은
인생은 참 미련스러운 것.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 하고
만남도, 이별도,
달리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뒤돌아보는 세상처럼
언뜻 눈앞을 스쳤다가 저만치 멀어져가는
그저 풍경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는 거기에 목숨을 거는 걸까?
늘 채워도 부족한 게 인생이지만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만난 인연들 모두에게
이 가을이 풍요로운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가을 여행길에서 만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하나에도 가슴 설렐 줄 알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작은 들꽃 하나에서도
삶의 의미와 창조주의 섭리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세월을 담백하게 이고 선 억새 같은 모습은 너무 쓸쓸한가?
휑하니 스치는 바람에 공허함을 느낄 줄 알면서도
가슴가득 보석을 품은 석류 같은 마음으로,
까쓸까쓸한 가을바람의 담백함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을 !
코스모스 핀 한적한 간이역 플랫폼에서
벙거지 모자를 쓰고 홀로 가을여행을 떠나는 여인에게
커피한잔 권하고 싶은 계절
청자빛 하늘을 두 손에 담으면
가을에선 뽀드득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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