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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공명에 무너지다.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7. 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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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첫 장맛비가 내린다.
열어둔 창문으로 쏴아~~ 투두두둑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빗줄기가 강한 모양이다. 
홀린 듯 창가로 나간다. 
2층 창문턱까지 자란 잎 넓은 나무위로 비가 쏟아지고,
상록수 두꺼운 잎에 부딪혀 튕기거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리를 숙여 빗물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나뭇잎은 춤추듯 흔들린다. 

좋다. 
도시의 먼지가 씻겨나간 두꺼운 상록수 푸른 잎 위에 맺힌 동그란 빗방울이 맑다.
손을 뻗어 맞아도 보고, 얼굴에 부딪히는 비의 포말이 촉촉하다.  

얼룩진 비의 풍경처럼, 멍하게 바라보는 내 눈의 초점도 흐려지고 이윽고 아련함에 빠져든다.
유물같은 어릴 적 추억과 무언지 모를 그리움 같은 것에 먹먹해진다. 

지금처럼, 난 어릴 적에도 비를 좋아했던 것 같다. 
비오는 날엔 늘 쪽마루에 걸터앉아 비를 바라보았다.
추녀 끝에서 허공을 날아 죽담아래 떨어지는 빗물은 땅에 옴팍한 구멍을 만들었고, 
비가 떨어질때 왕관모양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한없이 바라보던 소년은, 지금 어떤 그리움에 빠져 있다. 

나는 비 폐인이다. ㅎㅎ.
청마 유치환 시인은 바람부는 날은 견디지 못한다더니... 난 비오는 날은 견디기 어렵다
오늘도 빗소리를 들으려 우산을 들고 지하철로 출근했다. 
크고 팽팽한 우산은 빗소리를 흡수하지 않고 전달해 빗소리가 더 잘 들린다.    

통통, 투두둑 투두둑 ... 
팽팽한 우산을 두드리는 비의 공명은 참 듣기 좋다.
우산을 두드린 빗소리는 움푹한 우산 안에 모이고, 다시 달팽이관을 돌아 뼈까지 울릴 때면 온몸이 자그럽다.       

공명,.. 두 개의 소리굽쇠를 놓고 한 소리굽쇠를 치면, 그 소리의 진동(파장)이 같은 진동수를 가진 다른 소리굽쇠를 진동시켜 같은 음를 내게 하고, 계속 치게 되면 다른 소리굽쇠는 진폭이 커져 더 큰 공명을 만들어 낸다. 

나와 비, 나와 우산은 같은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가 아닐까?
빗소리의 진동(파장)에 나도 같이 진동해 저리고, 계속되는 비의 진동에 오히려 나는 더 큰 진폭으로 진동하는 건 아닐까? 

1940년 11월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Tacoma Narrows)에 놓인 현수교가 바람에 무너진 적이 있는데 사실은 공명(공진) 때문에 무너졌다고 한다. 바람에 의한 다리의 진동이 공교롭게도 다리 자체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면서 공명에 의해 진폭이 점점 더 커졌고, 결국은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했다는 것이다.

장마가 길어진다는데, 비가 많아진다는데 ...
그 공명에 나도 무너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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