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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을 위하여

유초잡감

by 유초선생 2024. 5. 2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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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초여름 바람이 시원해 창문을 열어둔다. 
도시의 바람이지만, 숲을 거치며 산소를 담아서 인지 아침바람은 산중의 바람처럼 상쾌하다. 
 
문득 무산 조오현 스님이 생각났다. 
스님의 시집 ‘적멸을 위하여’를 꺼내 다시 읽어본다.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그렇게 무산스님은 가셨다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을 알고, 만나고, 다투고, 그리워도 했건만 어찌 무산스님은 알지 못했을꼬?
가신 뒤에야 스님의 시를 통해 고요하고 맑은, 가득한 비움의 적멸을 그려본다. 

스님은 이미 적멸인데 ... 또 적멸을 위하여?
불에 달구고, 모루 위에 두드리고, 담금질을 해서 
더 단단해지고, 내 안에서 더 맑은 소리가 나도록 매질을 반복하는 것일까?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적멸을 위하여"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무산 조오현 스님의 시어는 화려하거나 거룩하거나 하지 않는 세상의 언어 그대로다.   
스님이든, 범부든, 장삼이사 모두가 쓰는 인간과 자연의 언어와 소리를, 덖지 않고 그대로 담아냈다.
스님에게 난데없이 찾아온 시.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청명하고 그윽하다.
정성들여 우려낸 맑은 차(茶)다. 
스님의 맑은 눈, 맑은 생각으로 삶을 궤뚫어 보는 직관과 촌철살인이 과연 적멸이고 해탈이다. 
 ‘하루살이’는 이 하루 안에 태어나서, 살고, 놀고, 자손을 남기고, 죽음까지의 일생을 다 경험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다 보았다.
내 나이 60을 넘어 이제사 조금 삶을 이해할 것 처럼 교만하지만,
우리가 100세를 산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하루살이의 인생이고, 하루를 살아도 깨달음을 얻으면 곧 성자의 삶이 아닐까? 

스님의 짧은 시 속엔 세상의 번뇌를 초월하는, 적멸에 이르기 전까지의 인생철학이 담겨있다. 
나 역시 잘난척 해봤자 결국 하루살이고, 불나방이고 기는 벌레일 뿐이다.

경허스님을 존경하고, 가끔 곡차도 마셨다는 무산 스님
믿음.거룩이라는 계율 안에, 율법 안에, 도덕 안에 스스로 차꼬를 차고 갇히진 않지만 자신과 대화하며 늘 수행하고 정진하는 모습이 좋다.
높은 곳에 올라 구태여 보여주려 하지 않음이 좋다.  

하루살이의 하루라는 짧은 삶속에 일생 전부가 들어있듯
스님의 단 몇 줄 되는 짧은 시 속엔 서정과 삶과 적멸을 향한 화두가 들어있다
그러고 보면 글이, 말이, 설명이 그리 길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나는 나를 다 알고 있을까?
향기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건 아닐까?
“아뿔사”. .... 하지 않도록 
 ‘오늘이라는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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