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작 초작 ....
반 잠결에 들려오는 조금은 익숙한 소리들이
빗소린가? 빗소리려니..........
비였으면 좋겠음에도 생각만 창밖을 향하고,
삶에 지친 몸뚱아리는 온돌매트의 따뜻함과 여인의 품속같은 아늑함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아
주말의 달콤한 게으름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달그락 달그락 ...
눈을 감고 있어도 오늘은 공인중개사 시험 본다고 일찍 집을 나서려는 마누라의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집안 살림에 식구 뒷바라지 한다고 고생하는데
시험장까지 태워주는 게 최소한의 도리인 것 같아 부스스 일어나니 7시 10분
10분이면 가는 시험장이라 너무 이른 것도 같고, 한 30분이면 나머지 잠 뿌리가 쏙 빠질 것 같아
“7시 50분에 출발하자“했더니 ... 혼자 갈 테니 걱정말고 좀 더 자란다.
늘 남편과 자식을 먼저 배려하는 익숙한 희생의 모습이 감사하지만,
한편 앙탈도 부리는 여인의 향기가 부족한게 아닌가도 싶어 좀 섭섭하기도 하다.
주섬 주섬 흐트러진 머리를 모자에 숨기고 현관을 나서니 제법 굵은 비가 온다.
팽팽한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공명이 되어 아득함을 전해오는데
문득 비에 젖은 맑고 고운빛깔의 단풍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가을, 가을비, 단풍 ..... 중년을 넘고 있는 아저씨 가슴에 덜컥 가을이 느껴진다.
아~이 가을이 며칠이나 더 우리 곁에 머물러 줄까?
사랑도 젊음도, 얼마나 더 우리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지켜줄 수 있을까?
시험장에 마누라를 내려다 주고 돌아오니 아직도 어둑함이 남아있고
아까 남은 잠 뿌리를 뽑으려니, 이미 깨어버린 시간이 아까워 책장 속 묵은 수필집을 꺼냈다
“사랑의 이름으로 고독한 마음으로”
누렇게 탈색한 책의 허리쯤을 아무데나 뚝 잘라 펼쳤더니 “아름다운 여인”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이브의 후예가 되던 날부터 무릇 여인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공단결 같은 머리채에 얼레빗과 참빗 민빗을 차례로 내리는 것은 미에 대한 무서운 추구다.
그래서 유비강 향수를 비롯한 온갖 화장료를 모아들이는 것이며, 좋은 옷감을 몸에 걸치려 하고.....
이 숨길 수 없는 아름다운 것에의 향수는 결코 나무랄 것이 못된다.
아름답기를 원하되 어찌하여 몸에 싸는 의상의 화려함에서 찾으려 들며,
저절로 아름다워지는 것을 피하고 하필 패물 등을 몸에 붙여 가지고 고와지려 하는 것이냐.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아름다움은 신통치 않은 용모도 예쁘게 보이게 할수 있는 것이며
잇속이 석류알 같다든지, 몸맵시가 난다든지, 살결이 곱다, 뺨이 복숭아 같다는 식의 미란
그다지 길게 인생에게 머물러 주는 것이 못되는 것이다
고운 마음씨를 가진 여인은 언제까지나 아름답다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인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진실한 정을 품은 여인은 항시 아름다운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속에 있으면 싸고 또 싸놓은 향내가 풍기듯이, 거죽의 꾸밈이 감히 어찌 여기에 견줄 수가 있을까"
우째 영 시골스럽다 싶어 말미를 보니 1949년에 노천명 시인이 쓴 수필이다
여인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나, 꾸며진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맑은 향기가 나고 오래간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아 씩 웃어본다.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주하는 거울에 고개를 배스듬히 해보면 목에 주름이 한 가득이다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원래도 없었긴 했지만 .... 한때 여인을 유혹하고자 했던 젊음은 이제 더 이상 무기가 못된다.
가만히 아내의 손을 잡아본다
곰삭여 생각해 보아도 모든 게 감사할 뿐이다
거죽의 아름다움 보다
진실한 정이 고독한 마음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가을이다.
11.21 작은 배려 (5) | 2023.11.21 |
---|---|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0) | 2023.11.20 |
꿈꿀 수 있다면 60은 청춘이다 (1) | 2023.11.20 |
11.20 (1) | 2023.11.20 |
11.17 (1) | 202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