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아들과 대화하고 토론한다.
30대 중반이지만 세대를 넘어 늘 진지하다.
나도 책도 많이 읽었고, 말도 잘한다고들 하는데 아들하고 붙으면 늘 내가 진다.
토론이라해서 서로의 주장을 펼치는 논쟁(debate)가 아니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꼰대가 되기 싫고, 나의 생각만을 고집하다 자식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들어주는 것도 있고 아들도 아버지 말에 격하게 공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가 아들 말에 설득당하고 만다.
우선 말하는 것이 조리있고, 청산유수다.
아는 것이 많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 정확하고, 사고력과 확장성이 뛰어나고, 실행력도 뛰어나다.
무엇보다 자신의 삶의 철학이 분명하고 독특한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란다.
“어린 놈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이런 지식과 생각들은 어디서 습득한 걸까?”
책을 많이 읽고 흡수력이 빠른건 알지만, 개념들이 잘 정리되고 있고 발상도 독특하다 보니 들으면 빨려들게 된다.
아들은 이전부터 에고(ego)가 강했다.
돈이 없어도 절대 비굴하거나 없는 척 하지 않는다.
칼로 자른듯 선이 분명하고, 가족, 직장, 돈, 여가, 행복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말할 때는 진짜 소름이 돋는다.
말이 많고, 내가 보기엔 좀 넘친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살고, 결과도 만들어가고 있으니 허언만은 아닌것 같다.
내 아들이지만, 멋진 꿈과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게 부럽다.
그래서 토론을 하면서도 (아닌척 하면서) 내가 깨우치고 배운다.
(사실 인생전반을 통해 체화된 가치관을 바꾸는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삶의 방식을 닮고 싶다)
사람의 심리와 본성을 잘 파악하는 통찰, 상대가 누구든 맞춤형 상담을 해주고 감동시킬 수 있는 기술. 실패를 해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것을 경험으로 다시 일어서는 용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전문성.
뭘 투자했는지 대박이 났다 했다가 다시 쪽빡을 차고, 0에서 시작해 다시 만회하는 이놈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그의 미래가 어디까지 확장되고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가 자못 궁금하다.
사실 아들은 공부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은 아니었다.
늘 부모 속을 썩히고, 말도 잘 안듣고,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되는 꼴통이었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잘 했던 걸 보면 공부도 잘 할 것 같은데 중.고등학교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F학점을 받아 재수강도 들었다
과외 학원을 보내면 배울 것 없다면서 돌아와버려 덕분에 과외비가 안들었으니 이때부터 효도를 한 것이다.
어떻게보면 공부는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고, 꼴통이라기보다 에고(ego)가 강하고 끼가 많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하나에 빠지면 끝까지 파고들어 알아내야 하고,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만다.
명품이 사고 싶으면 몇 달을 굶어서라도 사고, 옷의 원단이 궁금해서 이탈리아에 주문해서 받아보고, 청바지의 바느질 한 땀 한 땀의 간격까지도 따진다.
이런 아들에게 변화가 온 것은 군대에 갔다 온 이후 부터다.
워낙 속을 썩여 아내가 “죽지만 않으면 되니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했고, 기도 덕에 전방 부대에 입대했다. 의정부 훈련소 입소할 때도 혼자 보냈고, 용돈도 많이 보내주지 않았고, 휴가도 딱 한번 갔다.
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워낙 말솜씨가 좋아 부대에서도 카운슬링을 해주는 등 끼를 발휘했던 모양이고, 그때 가족의 소중함과 왜 공부해야 하는지, 돈이 뭔지, 삶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히 정립된 것 같다.
(이후 결과부터 말하면, 그 끼는 여전하지만 지금은 사치에도 관심이 없고, 부모나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제대 후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1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가겠단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좀 모으고, 모자라는 돈은 나중에 벌어서 갚을 테니 빌려달라고 한다.
공부도 못했던 놈이라 가능할까 했는데, 어쨌든 살이 빠진 상태지만 살아서 돌아왔다.
복학을 해서는 정신을 차렸는지 장학금도 받았고, 졸업 후엔 1년간 미국 패션 대기업에 인턴 사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독특한 건,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는 그리스 항구에 정박 중인 요트를 둘러보고, 인턴사원으로 미국에 갔을 때는 베버리힐즈의 저택들을 돌아봤다는데, 부자들의 감성을 느껴보고 싶어서라 했다.
숙소도 작은 달세 방이 아니라 (3명이 공동부담하여) 야자수와 수영장이 있는 빌라를 얻어 살았다. 그곳의 미국 가수들과도 어울렸고, 수프림(Supreme) 매장에 한정판이 출시되면 현지인에게 줄을 서서 사 오도록 했다는데 이런 당돌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론 미국에서 받은 월급은 다 쓰고도 모자랐을 테지만, 한인 의사집에 초대받아 놀러도 가고, 형뻘 되는 사람이 운영하는 한인마트를 대신 봐주기고 하며 인관관계를 만들어 가는 걸 보면, 바위 위나 사막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살 놈이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는 학업을 그만두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장사를 배우겠다고 해서 말렸다.
"장사하는 것도 경영지식과 마케팅이론 등을 알아야 더 잘할 수 있고, 공부하는 것도 시기가 있으니 꼭 하고 싶으면 학업을 마치고 가라"고 하니 포기는 했다.
이후 "그 꿈에 변함이 없느냐" 했더니 (그때 갔어야 했는데) 이미 타이밍도 지나갔고 의욕도 떨어져 이젠 못한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책임을, 그때 못 가게 한 아버지한테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무섭다.
이때부터 나도 절대 아들이나 딸의 인생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회사 인턴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조그만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이제 세계를 무대로 타고난 장사꾼의 기질을 발휘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역시 화려한 언변으로 새로운 거래처를 뚫고, 두바이, 상하이, 남미 등 무역박람회에도 참가하는 등 자신의 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회사에서 인수한 미국회사의 책임자로 파견되어 근무 중이다.
여기서도 끼는 계속된다.
회사에서는 파견 후 3년간은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도, 막상 현지에 가보니 여러 문제점들이 발견되자 ‘당장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했고, ‘자기가 책임지고 고쳐놓겠다’고 승인받아 조직의 분위기를 바꾸고 업무효율화도 이루어 냈다고 한다.
(굳이 예를 들자면) 50대 백인 직원에게도 “당신 지금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 같으면 이런저런 조사도 하고, 이런 협상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 걸 안한다면 당신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질책하여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런 카리스마와 함께 한편으론 매너있는 괴짜다.
항상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커피도 타주고, 개그도 잘해 늘 웃음이 가득한 직장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나이를 불문하고 맞춤형 고민상담과 해법도 제시해주고, 저녁도 사주고 하니 어린 나이임에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며 모두가 신기해한다고 한다.
또 회의를 통해 ‘우리 이것 한번 해자’며 모두가 머리를 맞대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 결과까지 만들어 내다보니 다들 일하는 재미도 있고 의욕도 생긴다는 것이다.
또 아직 한 번도 팔아보지 않은 제품이었는데 정보 분석을 통해 그 제품의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과감하게 물건을 들여와 완판해 버린 일은 예측과 분석, 추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한번도 팔아본 적 없고 거래처도 없는데 만약 못 팔게되면 재고가 쌓이고 엄청난 리스크가 생긴다며 본사에서 선뜻 결정을 못내리자, 디테일한 분석자료를 보내 설득하고 “내가 책임지겠다”며 진행시켰다.
다행히 예측이 맞아 떨어져 1차 물량을 고마진에 완판하고, 계속 주문이 이어져 환율인상 효과와 함께 역대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니 영화같은 이야기다.
이런 성과로 직원도 늘리고 전직원 특별 성과급까지 받다보니 회사의 성장은 물론 직원들의 동기부여도 함께 이루어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변화들은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리더십과 약간의 너지(nudge)를 통해 스스로 변하도록 만든 것이다.
결론에 오기까지 사적이고 잡다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결코 자식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첫째)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점수 10점 더 받는다고 10% 더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도, 일을 10% 더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모르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무식하면 할 수가 없는 일도 많다.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고 실행하려면 경제의 작동원리나 구조(매커니즘)를 알아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실행하려면 절차적 단계와 규칙(알고리즘)도, 관련법도 알아야한다.
수시로 변하는 원유, 광물, 곡물, 금은 등 원자재 값을 데이터화하고, 주식시장과 국제관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분석해 실무에 대입할 수 있는 운용능력, 컴퓨터 활용능력과 엑셀등도 자유자재 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세계를 무대로 한 활동이나 사업을 하려면 외국어도 잘 해야 한다.
안다는 것, 기술을 가진다는 것은 도배, 미장, 배관, 용접, 제빵, 자동차정비, 교육...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기능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지식의 범주다.
아무리 꿈이 있고, 의욕이 넘치고, 노동에 가까운 노력을 한다 해도 무엇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없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그럼에도 무식해서는 안 된다.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한다.
둘째)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혜는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모든 일에는 늘 상대가 있다.
그게 장소면 가정, 학교, 직장, 모임 등이 될 테고, 인간간계라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상급자와 하급자’, ‘연로자와 연소자’, ‘남녀’가 있고, 거래관계라면 ‘공급자와 수요자’, 주도권에 따라 ‘갑’과 ‘을’이 있다.
거기다 지금 당장은 당사자가 아니지만 관람자가 있고, 미래의 상대가 될 고객도 있다.
하물며 자연인도 자연을 상대로 한다.
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고, 잡음과 분쟁을 없게 하고, 일을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판단을 내리고, 일을 추진해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해력, 분석력, 설득력, 순발력, 추진력, 지도력, 조정능력, 카리스마, 언변, 대비 태세, 강약조절, 태도.... 이 모든 것이 지혜의 범주다.
이론적으로 아는것이 많다고, 학력이 높다고 이런 것들을 잘 해낸다고 할 수는 없다.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어야 한다.
셋째) ‘끼’가 있어야 한다
‘끼’는 개성이다. 타고난 재능이면서 곧 생명이다. 쌀의 눈이다.
타고난 춤꾼, 소리꾼, 장사꾼, 글꾼 ... 자기가 좋아하는 쪽에 재능을 타고나거나 능숙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다.
TV 오락프로그램 나와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는 아이들을 보면 '끼가 있다'고 한다.
8살에 트로트를 저렇게 잘 부르고 춤을 저렇게 잘 춘다고?
물론 연습도 하겠지만 이건 연습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분명 끼가 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아들도 공부는 못했지만 끼가 있었다.
명품을 산 후 잘 쓰고는 이익을 남기고 되판다. 타고난 장사꾼 기질이다.
청바지 하나를 사도 청바지의 유래, 브랜드의 특장점을 알고 난 후 산다.
같은 디자인에 같은 원단,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오리지널이 아니면 진짜가 아니란다.
철두철미하다. 브랜드를 입는 것은 감성을 입는 것이고, 그 브랜드의 역사와 가치를 입는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남에게도 마찬가지다. 옷이나 제품을 추천해 줄 때도 당사자를 철저하게 분석한 후,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맞춤형 제품, 시간이 흘러도 싫증나거나 가치가 변하지 않을 제품을 골라준다.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해주다보니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지금의 회사에서 영업을 할 때도 이렇게 하지 않을까 싶다.
'끼'는 이야기거리를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든다.
얼굴도 예쁘다고, 공부 잘한다고, 성실하다고 해도, 개성이 없으면 이야기거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끼를 잘 살리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끼'는 생명이다.
4) 마지막으로 실력이다.
실력은 지식과 지혜와 끼를 합한 것을, 실천에 옮기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추진력이고 실행능력이다.
물론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으면 유리한 것은 당연하고 확장성도 높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학력, 스펙만이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식이 많다고, 끼가 많다고 해서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지식과 지혜와 끼의 바탕위에, 추진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있을때 비로소 '실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 되고, 종속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될 수 있다.
불평불만, 평등만을 외칠것이 아니라, 일을 설계하고, 관리하고, 추진하는 전과정을 능숙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진짜배기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 삼성의 인재경영 철학이다.
세상은 정글이다.
공기나 햇볕, 시간처럼 세상이 누구에게나 다 공정하지가 않다.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적자생존 하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성공도 좋다. 그런데 도대체 성공의 기준은 뭘까?
없어도 불편하지 않으면 충분한 것이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이 성공한 것이 아닐까?
그러려면 자신의 '끼'대로 사는 것이다.
'끼' ...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이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고, 그 끼를 발휘하며 살아야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끼'가 있나요?
당신은 지금 그 '끼'를 잘 살리고, 발휘하며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