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초잡감

장자의 바람과 구멍 이야기(제물론)

유초선생 2024. 12. 30. 17:47

 

니체가 서양철학사의 반항아라면 장자는 동양철학사의 이단아다. 
철학자 강신주는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속절없이 내팽개치는 강력한 겨울바람과 마주치는 일이라고 했다.

높은 산 산등성이를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거칠고 칼날처럼 날카롭다.
그 바람을 견딘 나무들은 봄에 철쭉꽃을 피운다. 
장자는 큰 산이고, 날카로운 바람이다. 
장자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은 자신을 날려버리고 부딪혀 깨트려질 만한 충격이 있는 한편, 그 바람 속에는 봄의 따뜻함과 철쭉의 향기가 묻어있다. 
그 바람이 만들어낸 흔적이 바로 내공이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소리를 내는 바람과 구멍을 꾸짖을 때는 추상과도 같고, ‘소요유’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폴짝거리며 날아다니고, 어슬렁거리며 노는 자유를 이야기 할 때는 따스한 봄 햇살 같다. 

나는 ”이것은 안 돼, 저것도 안 돼, 이래야 돼“ 라며 행동을 구속하는 공자보다, 마음하나 고쳐먹으면 자유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인간 장자가 좋다.  

《장자》는 6만 5천자로 이루어진 방대한 내용으로 내편, 외편, 잡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편은 장자가 쓴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제자들이 쓴 위작이라고 알려져있다. . 
내편은 소요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은제왕의 7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제물론'이 《장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글로 평가된다. 

제물론(齊物論) ‘사물을 가지런히 하다’, ‘하나로 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하나로 통일된,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다양함 속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는 의미다. 
같은 것이지만 보는 사람,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은 같다. 

오늘날과 같이 혼란스런 시대에는 불거진 문제를 가지런히 펴 놓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고, 이분법적으로 그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잘 조화시켜 하나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추구하고 '통일성 속에서 다양성'을 같이 추구하는 것이다. 

제물론 속의 '바람과 구멍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메세지를 던져준다.    

대지가 내 뿜는 기운을 바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성난 듯 소리를 낸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바람과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멍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큰 나무의 구멍들,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술잔 같고, 병 같고, 절구통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구멍들인데, 
거기서 나는 바람소리는 물 흐르는 듯 급격한 소리, 씽씽 화살 나는 듯 높은 소리, 꾸짖는 듯 질타하는 소리,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 소리, 웃는 소리, 귀여운 소리같이 온갖 소리를 낸다. 

이 바람소리는 누구의 소리인가? 바람이 내는 소리인가? 아니면 구멍들이 내는 소리인가?
사실 바람소리는 바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리도 아니며, 구멍들이 가지고 있는 소리도 아니다.
바람과 구멍이 예기치 않은 마주침에서, 다시 말해서 다양한 강도와 방향을 가진 바람, 그리고 다양한 모양과 깊이를 가진 구멍 사이의 우연한 마주침에서 만들어 지는 소리다.  

바람이 없거나, 구멍이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마주침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소리다. 
어떤 바람과도 마주치지 못하는 구멍, 혹은 공허하게 허공만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무릇 불어대는 소리가 일만 가지로 같지 않고, 그 소리는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그 모두가 스스로 초래한 소리라면, 그 구멍으로 하여금 힘찬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손바닥도 마주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돌아보자. 내 스스로 이 세상의 소음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람을 일으켜 가만히 있는 구멍을 자극했을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데 내가 구멍을 만들어 소음를 나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 내가 바람이라면 천천히 흐르든지 구멍을 피해가고, 내가 구멍이라면 구멍을 감싸든지 바람을 피해버리면 된다. 

2,500년 전 장자의 통찰이 날카롭다.  
내 존재를 되돌아보고, 고착화된 내 사고를 깨부술 만큼 묵직하다.
장자에게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겨울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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